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강경 보수 성향의 성직자 출신 후보가 당선됐다. 미국으로부터 제재받은 이력이 있는 반미 성향 인사가 이란 대통령이 되면서 중동의 지정학적 긴장도가 높아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란 내무부는 대선에서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 후보(60·사진)가 1792만여 표(약 61.9%)를 얻어 당선됐다고 19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전날 치러진 대선에서 라이시는 2위인 혁명수비대 출신 모센 레자에이(341만여 표·약 11.8%), 3위 개혁파 압돌나세르 헴마티(242만여 표·약 8.4%)를 제치고 압승을 거뒀다. 라이시는 오는 8월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임기는 4년이다.
하지만 라이시가 이란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이란 헌법수호위원회는 지난달 대선후보 명단을 발표하면서 에샤크 자한기리 수석부통령 등 중도·개혁 성향 인사들을 제외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젊은 유권자들이 투표 거부 운동을 벌여 이번 대선 투표율은 48.8%로 1979년 이슬람혁명 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2017년 대선 투표율은 약 73%였다. 개표 결과 무효표 비중이 14%를 차지할 만큼 이란 국민의 실망이 드러나기도 했다.
라이시는 성직자 출신으로 정치적 성향은 강경 보수로 평가된다. 현재 이란의 실권을 쥐고 있는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최측근이자 유력한 후계자 후보로 꼽힌다. 그는 신학교에서 하메네이의 제자였으며 한때 성직자 생활을 했다. 하메네이는 라이시에게 검찰총장 등 사법부의 주요 요직을 두루 맡겼고 2019년에는 사법부 수장으로 임명했다. 라이시는 하메네이가 사망했을 경우 후임을 결정하는 국가지도자운영회의 부의장이기도 하다. 라이시의 당선으로 이란의 강경 보수파는 8년 만에 입법과 사법, 행정을 모두 장악하게 됐다.
라이시의 외교노선은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 거리를 두고 친(親)러시아·중국을 표방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미국은 하메네이와 라이시의 밀접한 관계를 들며 2019년 제재 대상에 라이시를 포함시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란과 광범위한 안보협정을 맺고자 하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목표에는 장기적으로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일단 하메네이와 라이시는 주요 현안인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복원 논의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선 제재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라이시의 당선을 두고 각국의 반응은 엇갈렸다. 미 국무부는 “이란인들은 공정 선거를 박탈당했다”는 입장을 냈다. 야이르 라피드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이란의 새 대통령은 ‘테헤란(이란의 수도)의 도살자’로 알려져 있으며 핵과 테러에 집중할 인물”이라고 트윗했다. 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등 반미 성향 지도자들은 라이시 당선을 축하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