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표 초상화가'의 감성적이면서도 직관적인 얼굴…엘리자베스 페이턴 개인전

입력 2021-06-20 17:07
수정 2021-06-21 00:31

1993년 미국 뉴욕의 첼시호텔 828호에 목탄과 잉크로 그린 초상화 21점이 걸렸다. 스물여덟 살의 무명 화가 엘리자베스 페이턴의 첫 개인전이었다. 초유의 ‘호텔 전시’는 페이턴과 마찬가지로 20대의 무명이던 갤러리스트 개빈 브라운이 작품을 전시할 공간이 없어 짜낸 아이디어였다. 관람객은 불과 50여 명. 하지만 세련된 그림과 파격적인 전시가 입소문을 타면서 이들의 이름은 미술계에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초상화가와 세계적인 갤러리스트가 된 두 사람의 시작이었다.

페이턴의 국내 첫 개인전이 서울 창성동 리안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유화와 드로잉, 모노타입 작품 등 11점을 소개하는 전시다. 페이턴은 프리다 칼로와 데이비드 보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등 유명인의 초상을 간결하면서도 직관적으로 그려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스위스 쿤스트뮤지엄 바젤, 미국 보스턴 미술관·휘트니 미술관·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뉴욕 현대미술관 등 세계 유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그림은 신작 ‘양조위’(2021)다. 왕가위 감독 영화 ‘해피 투게더’(1997)에 나오는 양조위의 옆얼굴을 파스텔 톤의 유화 물감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무심한 듯한 붓 터치 사이로 섬세하게 묘사된 긴 속눈썹에서 영화 속 캐릭터의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투탕카멘’(2020·사진)은 1922년 영국 발굴단이 이집트 투탕카멘의 무덤 속에서 황금 마스크를 처음 발견한 순간을 묘사한 그림이다. 금빛 파스텔은 파라오가 생전에 누렸던 영광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를, 검은색과 청록색 위주의 어두운 색감은 허무를 암시하는 듯하다.

페이턴은 대상의 얼굴 구석구석을 섬세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인물의 분위기를 재해석해 빠른 붓질로 잡아낸다. 간결한 선 덕분에 화려한 색채로 표현된 인물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욱 부각된다. 페이턴은 “나는 사람들이 얼굴에 축적된 시간 중에서 필요한 것을 건져내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고 싶은 대로 표현한다”고 말했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페이턴의 그림이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작품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다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가로 20㎝, 세로 30㎝ 안팎의 소품인데도 가격이 수억원에 달한다. 이번 전시에서도 개막 첫날 11점 중 8점이 팔려 나갔다. 전시는 7월 3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