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역사의 모든 페이지엔 바다가 있다

입력 2021-06-17 18:16
수정 2021-06-18 02:33

역사의 승자 주변엔 언제나 바다가 있었다. 바다는 민족과 국가의 성쇠를 좌우했다. 발견과 혁신의 요람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존중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바다에 무지했다. 거리낌 없이 남용하고, 주저 없이 더럽혔다. 역사가들은 ‘바다의 시각’에서 인간의 역사를 다룰 생각은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인류의 삶이 투영된 바다를 언제까지나 내버려둘 수는 없는 법. 보다 못한 시대의 석학이 바다와 얽힌 ‘총체적 역사’를 쓰겠다며 펜을 들었다.

《바다의 시간》은 정치·경제·문화·역사를 아우르는 유럽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자크 아탈리 전 유럽부흥개발은행 총재가 바다를 주제로 인간과 자연의 전체사를 시도한 책이다. 우주의 탄생과 물의 생성, 생명의 등장부터 바다와 얽힌 동서양 인류사, 환경 문제와 향후 바다의 지정학 변화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두루 다뤘다.

분량으로 보나 서술의 상세함으로 보나 저자가 역점을 둔 부분은 바다와 얽힌 인류의 역사다. 역사의 첫 단계부터 바다는 인간의 권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기원전 1194년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3세가 나일강 삼각주에서 ‘바다의 민족’과 역사상 첫 해전을 벌인 이래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의 승패는 예외 없이 바다에서 정해졌다.

제국은 해양 패권을 확보함으로써 가슴 속에 품었던 야망을 이뤘다. 그리고 더는 바다를 통제하지 못할 때 쇠퇴했다. 그렇게 페니키아와 그리스, 로마, 베네치아, 네덜란드가 바다에서 흥했고, 바다에서 망했다.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의 ‘누벨 프랑스’와 인도에 건설했던 거대한 제국을 잃은 것은 해군이 빈약했던 탓이었고, 워털루에 10년 앞선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의 몰락은 예정됐다. 영국은 유럽 대륙의 영토에 관심이 없었다. 진짜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기에 계속해서 바다를 지배하길 원했을 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다를 경시했던 이들은 큰 대가를 치렀다. 중국은 바다를 건넌 서양세력의 도발에 만신창이가 됐다. 육상의 전쟁은 바다를 통한 물자 공급 없이는 불가능했기에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무릎을 꿇어야 했다. 쓰시마 해전으로 결판이 난 러일전쟁, 러시아 혁명의 불을 붙인 전함 포템킨호 폭동, 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된 미드웨이 해전과 노르망디 상륙 등 바다를 배경으로 역사의 심판이 내려진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칼의 결정’뿐 아니라 사상과 종교라는 ‘펜의 힘’도 바다를 통해 확산했다. 배가 없고, 지중해 항구들 사이에서 상품과 메시지를 전달하던 상인이 없었다면 유대민족은 예루살렘의 제2 성전이 파괴된 뒤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배를 타고 기독교를 퍼뜨렸고, 내륙 지역인 일 드 프랑스(프랑스 파리 인근 지역)와 독일에 앞서 브리튼(영국)과 아일랜드 해안가에 먼저 뿌리를 내렸다. 이슬람교 역시 지중해와 페르시아만, 인도양을 통해 확장됐다.

바다는 중요했지만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신이 분노를 표출하는 공간이었고, 시험의 장소였다. 온갖 위험이 도사렸고, 사소한 실수가 목숨이 오가는 치명적 사고로 변했다. 바다를 통해 수많은 불행이 닥쳐왔다. 폭풍과 난파, 해적질이 일어났고, 항구로는 나쁜 소식과 전염병, 적군이 닥쳤다.

위험했기에 역설적으로 인류에게 필요불가결한 발견과 혁신이 바다에서 일어났다. 역동적인 문명일수록 더욱 열렬하게 바다와 대면했다. 19세기에 기근과 정치 혼란을 피해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독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따라 사회의 활력도 움직였다. 20세기 중반 컨테이너 혁명과 일본과 한국, 중국의 부상에 힘입어 세계 무역의 추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동했다. 싱가포르와 요코하마, 부산 그리고 중국의 항구들이 처리하는 컨테이너 수와 선박 톤수에서 미국과 영국의 항구를 압도했다. 2017년 현재 전 세계 인구의 60%가 바다에서 150㎞ 이내 ‘해안 지역’에 거주한다.

문명사적으로 바다가 중요한 것은 바다가 인류문화의 주요한 원천이라는 점이다. 바다는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모두에게 자유로운 접근권을 보장했기에 모험과 용기, 선택, 자유라는 가치를 잉태했다. 현실적으로도 바다를 통해 유례없는 규모로 물자와 정보가 오가고, 어업과 관광, 해저 자원 탐사가 이뤄지고 있다. 미래에는 어느 때보다 많은 경제력과 군사력이 바다로 집중되고, 치열한 경쟁이 바다에서 먼저 불거질 전망이다. 저자가 바다를 시야의 중심에 놓고 인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되짚어본 이유일 것이다.

다만 300여 쪽의 많지 않은 분량 속에 천문학과 생물학, 경제학, 정치학, 미래학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의 역사를 두루 논한 까닭에 균형이 맞지 않거나 성근 구석이 적잖게 눈에 띄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