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껍질 벗은 날것…고갱이 갈망하던 유토피아였다

입력 2021-06-17 17:15
수정 2021-06-18 02:14

독일 미래학자 군둘라 엥글리슈는 저서 《잡노마드 사회》에서 21세기 새로운 종족인 ‘잡노마드(job nomad)’가 미래의 흐름을 주도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잡노마드는 한곳에 머무는 정착민적인 삶을 거부하고 국경 너머로 이동하며 새로운 기회와 가치를 찾는 유목민적 세계관을 지닌 자유롭고 창조적인 인간형을 말한다. 낯선 사고방식과 삶에 개방적인 잡노마드의 표본으로 삼을 만한 화가가 있다. ‘고귀한 야만인’ ‘서구문명의 이단아’로 불리는 폴 고갱(1848~1903)이다.

고갱이 도전의식과 변화의 욕구로 충만한 노마드의 삶을 선택한 동기가 있었다. 혼혈 혈통과 다문화적 성장 과정, 성공에 대한 야망이었다. 프랑스 언론 정치부 기자인 아버지와 페루 귀족 가문의 프랑스계 혼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고갱은 파리에서 출생했지만 외가가 있는 페루 리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급진 공화주의자이던 고갱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자 처가가 있는 페루에서 신문사를 세울 꿈을 품고 가족과 함께 뱃길에 올랐다가 항해 도중 사망했다.

고갱은 13세에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다문화 경험이 그의 모험심을 자극했다. 그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등 항해사가 돼 6년 동안 지중해, 남아메리카, 북극 등을 항해했다. 이후 고갱은 주식 중개인으로 성공해 가족과 함께 유복한 생활을 하던 중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36세이던 1883년 주가 폭락을 계기로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변신했다. 미술계는 독학으로 화단에 입문한 늦깎이 화가를 인정하지 않았다. 획기적 전환점이 필요했던 고갱은 1891년 파리를 떠나 남태평양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타히티로 갔다.

중년에 접어든 그가 아내와 다섯 자녀를 버리고 타히티로 간 것은 이국적 풍광을 즐기려는 관광 목적이 아니라 열대의 자연에서 새로운 예술적 영감과 주제를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문화권인 타히티에서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화풍을 창안해 아마추어 출신 무명화가라는 꼬리표를 떼고 성공하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원시문화에의 동경과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 새로운 화풍 창안이 타히티에 체류하게 된 배경이라는 것은 고갱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문명의 껍질을 벗겨내고 평화롭게 살기 위해 파리를 떠나는 것이다(…) 나의 관심사는 기계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야성을 간직한 원주민처럼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원시적인 표현 수단으로만 가능하다.’ 고갱의 대표작을 감상하면서 그의 떠남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살펴보자.

그림에 타히티 전통의상인 파레오를 입은 4명의 여성이 등장했다. 여성들은 넓적한 코, 두툼한 입술, 갈색 피부 등 전형적인 타히티인의 특성을 지닌 토착민이며, 배경의 전통가옥도 원주민의 오두막이다. 실제 타히티 여성과 자연 풍경을 그렸지만 현실 세계가 아니라 이상향처럼 느껴진다. 한가롭게 여가를 즐기는 여성들의 표정과 자세에서 근심이나 걱정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타히티 여성들은 윤리와 도덕이 엄격한 유럽 여성과 달리 성적인 면에서도 자유롭다. 열대 과일을 들고 있는 여성은 젖가슴을 드러내고도 당당한 눈빛으로 관객을 바라보지 않는가.

그림 속 타히티는 ‘원시적 낙원’이요, 여성들은 야성적 관능미를 지닌 ‘에덴동산의 이브’다. 고갱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누구나 꿈꾸는 지상낙원을 이 작품에 표현했다. 이 그림은 남태평양 버전의 이상향, 낙원, 도원경, 유토피아, 아르카디아, 샹그릴라다. 고갱이 창안한 원시적 화풍도 낙원의 풍요와 행복을 강조한다. 원시적 화풍이란 대담한 굵은 윤곽선과 빨강 파랑 노랑 등 강렬한 원색의 색면 대비로 상징적이고 장식적으로 화면을 구성한 표현기법을 말한다.

고갱은 1893년 9월 프랑스로 잠시 돌아와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로 전시회를 열었지만 원시적 주제와 혁신적 화풍은 비평가들과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크게 실망한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건너가 그림을 그리다가 1903년 54세로 히바오아섬 아투오나에서 삶을 마감했다. 영광은 뒤늦게 찾아왔다. 고갱 사후 타히티에서 그린 열대 그림과 독창적 화풍은 야수주의, 표현주의, 추상표현주의 등 현대미술의 탄생에 기여했다. 영국 소설가 서머싯 몸은 고갱의 생애를 모델로 삼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달과 6펜스》를 통해 그가 노마드의 원조라는 것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이명옥 < 사비나미술관 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