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 커진 ETF, 이젠 시장을 뒤흔든다

입력 2021-06-15 16:30
수정 2021-06-16 00:38
국내 상장지수펀드(ETF) 순자산 총액이 60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분산 투자와 시장을 통째로 사는 기능이 있다는 장점에 새로운 투자 수단으로 부각된 결과다. 하지만 각종 테마와 섹터 ETF 등에 자금이 한꺼번에 몰리며 가격 왜곡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ETF의 덩치가 커지면서 기업의 의사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시장이 ETF를 따라간다15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상장 ETF 순자산총액은 지난 14일 기준 59조515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말 이후 약 반년 동안 7조4785억원 증가했다.

ETF의 성장을 가속화한 건 각종 섹터형 ETF다. 주식형 섹터 ETF의 순자산총액은 전년 말 대비 약 두 배(3조9946억원)로 늘어 7조9184억원에 달했다. 2차전지 등 일부 섹터의 성장 가능성에 베팅한 자금이 몰린 결과다.

2차전지 ETF가 커지면서 이들의 주식 보유량도 급증하고 있다. 펀드평가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패시브펀드(ETF+인덱스펀드)의 주요 2차전지 주식 보유 수량은 각 종목 발행 주식 수 대비 2~4%에 이르는 것(3월 말 기준)으로 조사됐다. 패시브펀드가 보유한 에코프로비엠 주식은 발행 주식의 4.6%에 달했다. 전년 대비 136.97% 증가했다.

ETF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지난 11일 2차전지주 급등이 그런 사례다. 이날은 6월 선물옵션 만기일에 맞물려 2차전지를 포함한 각종 지수가 리밸런싱됐다. ETF가 지수 변경을 따라가면서 관련 종목의 주가가 급변했다. 덩치가 커진 2차전지 ETF의 영향력이 컸다. 처음 지수에 편입된 SK아이이테크놀로지는 이날 10%대 급등세를 보였다. 반면 지수에서 빠진 에코프로에이치엔은 5.93% 급락했다.

시장에선 ETF가 커지면서 기업 실적과 관계없이 단순 ETF 수급만으로 가격이 변동하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버블 논란도 있다. 일단 ETF에만 묶이면 펀더멘털과 상관없이 주가가 전반적으로 오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 펀드매니저는 “ETF가 커지고 ETF의 개별 종목 지분율이 높아지면 매도가 매도를 부르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며 “ETF가 담은 종목의 주가가 내리면 ETF 매도가 나오고, 그로 인해 또 종목의 주가가 하락하며 ETF 추가 매도가 나오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테슬라 등 성장주를 대거 담았던 미국의 ARK이노베이션ETF는 금리 상승에 성장주가 맥을 못 추자 지난 2월 12일부터 약 한 달간 운용자산이 78억달러 빠지며 주가도 31% 급락했다. ETF 손에 맡겨지는 기업의 운명ETF가 종목 투자에 어려움을 느끼는 투자자에게는 좋은 수단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 경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국내에는 아직 사례가 없지만 미국에서는 최근 엑슨모빌 주총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

지난달 26일 엑슨모빌 주총에서 행동주의펀드 ‘엔진넘버원’은 탄소 감축을 기치로 걸고 표 대결을 통해 이사회 세 자리를 따냈다. 엔진넘버원은 지분을 0.02%밖에 들고 있지 않았지만, 블랙록이나 뱅가드 등 자산운용사 표를 모아 이사회 진입에 성공했다. 자산운용사들은 ETF 등 패시브펀드를 통해 엑슨모빌 지분을 대규모로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의결권 행사는 문제없지만 ETF 투자자들이 운용사의 의결권 행사에 명확히 동의한 적이 없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자산운용사들은 의결권 행사 내역을 분기에 한 번씩 몰아서 공개하기 때문에 투자자가 즉시 확인할 수도 없다. 지난해 10월 LG화학 물적분할 관련 임시주총에서도 자산운용사들은 의결권을 행사했지만 투자자는 올 1월에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증권가에선 ETF가 커질수록 관련 논의가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 펀드평가사 모닝스타는 “일반 국민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기업의 의사 결정이 일부 자산운용사에 집중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인덱스펀드 매니저가 아닌 투자자들이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방식도 논의되고 있지만 아직 명확한 해결책이 나오진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