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투자자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던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 열풍이 빠르게 식어가고 있다. 스팩을 통해 미국 증시에 상장한 주요 기업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적을 내면서 주가도 크게 떨어지는 추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뱅크의 자료를 인용해 지난해 스팩과 합병해 미 증시에 상장한 기업 중 절반가량이 실적 목표치를 충족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WSJ는 “좋지 못한 성적에 스타트업들은 스팩과의 합병 제안을 거절하고 있다”며 “스팩 대신 벤처캐피털(VC), 사모펀드 등으로 눈을 돌려 자금을 조달하는 방안을 더욱 선호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올해 들어 스팩 기업의 주가도 크게 떨어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금융정보회사 리피니티브의 자료를 인용해 지난해 초부터 스팩을 통해 상장한 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의 회사 41곳을 분석한 결과 주가가 최고점 대비 평균 39% 하락했다고 보도했다. 주가가 정점 대비 5% 이내로 유지되고 있는 기업은 3곳에 불과했다. 18곳은 주가가 최고점에서 50% 이상 떨어졌다.
스팩은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조달한 뒤 유망 기업을 찾아내 인수합병(M&A)하는 서류상 회사다. 기업들의 우회 상장 통로로 떠오르면서 지난해부터 여러 유명인사도 스팩 투자에 잇따라 나서는 등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최근 1년간 글로벌 증시에서 신규 상장으로 조달된 2300억달러 가운데 절반가량이 스팩에 몰릴 정도였다.
하지만 과열 우려 등으로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스팩 기업을 대상으로 감독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글로벌 투자자는 최근 스팩 투자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스팩 투자 열기가 빠르게 식어가면서 관련 상장지수펀드(ETF) 역시 수익률이 크게 떨어지는 추세다. 미국에 상장된 200개 이상 스팩 주가를 추종하는 ETF인 ‘디파이언스 넥스트 젠 스팩 파생 ETF’는 최근 3개월간 30% 넘게 하락했다.
유망해 보였던 스팩 기업들도 힘을 못 쓰고 있다. 지난해 12월 스팩을 통해 뉴욕증시에 입성한 전기자동차 스타트업 XL플리트의 주가는 상장 직후 70%가량 상승해 35달러까지 치솟았지만 최근엔 7~8달러대에 거래되고 있다. 트럭 부품 제조업체인 힐리온 역시 스팩을 통해 상장한 뒤 주가가 다섯 배 이상 올랐지만 현재는 최고점 대비 80%가량 하락했다.
월가 투자은행들의 스팩 관련 수수료가 크게 줄어든 것도 스팩 열풍이 식어가고 있는 것을 방증한다. 리피니티브에 따르면 투자은행들은 올해 1~2월 스팩 기업의 합병과 상장 관련 수수료로 30억달러를 벌어들였다. 하지만 4~5월에는 관련 수수료가 4억3000만달러로 올초에 비해 7분의 1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