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주방용 오물분쇄기가 국민건강 위협한다

입력 2021-06-06 17:16
수정 2021-06-07 00:34
영국의 의학 전문지 ‘브리티시 메디컬 저널’에서 인류 건강에 이바지한 의학적 성과를 두고 투표한 결과, 1위는 항생제나 백신이 아니라 ‘하수도와 깨끗한 물’이었다고 한다. 1931년 영국에서 콜레라로 1만4000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보건법이 시행되고 우선적으로 하수관로 공사를 시행했다. 1932년 프랑스도 콜레라 유행을 계기로 하수도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런 대규모 투자로 얻은 것은 국민의 건강한 삶이었다. 인류가 고통받는 전염병 중 80%가 수인성이고, 부실한 하수도 시설 때문에 아직도 후진국에서 사망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긍이 가는 결과다.

하수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문명의 소화기와 순환기 역할을 한다. 도시에서 발생하는 오수는 하수도 시스템을 통해 모여서 정화된다. 하수도 시스템은 전염병으로부터 공중위생을 보호하고, 더러워진 물을 정화해 하천과 바다의 수질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강우가 만드는 침수 위험은 우수관망을 통한 신속한 배수로 해결되며, 도시의 시민들은 안전하고 쾌적한 삶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러나 늘어나는 하수 오염물 부하와 새로운 형태의 생활 문화로 하수도 시스템의 처리 한계가 초과할 때도 있어 도시의 가장 중요한 인프라 중 하나인 하수도 시스템의 안정적인 운영에 비상경보가 울리고 있다.

최근 주방용 오물분쇄기 제조·판매와 사용 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하수도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주방용 오물분쇄기는 1995년 하수도 영향을 고려해 판매 및 사용을 금지했으나, 2012년 인증제품에 한해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인증 조건은 분쇄기에서 고형물의 80%를 모아 따로 배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조건은 불법적인 조작과 편법에 의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고, 오물분쇄기 판매량 증가는 결과적으로 하수 처리 용량을 위협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오물분쇄기를 이용해 음식물 찌꺼기를 갈아서 하수도로 배출하는 경우 배수 및 관로 막힘과 악취 등의 민원을 일으킨다. 하수처리장의 유기물 부하를 높여 처리에 필요한 전기 등 처리 비용 증가도 불러온다.

불필요한 물 사용량을 증가시키고, 음식물쓰레기 자원화 정책에도 역행한다. 주방용 오물분쇄기 사용이 허용된 일본에서도 도입 시 대전제는 오물분쇄기 사용으로 기존 하수도시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만약 전국 공동주택의 음식물쓰레기가 하수도로 전부 배출되는 경우, 오염물 부하가 약 27% 증가하고, 하수처리장 증설 등에 약 12조2000억원의 비용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한다.

주방용 오물분쇄기의 불법적 사용에 대해 시민사회와 국회에서 꾸준히 문제점을 제기해 왔지만, 실질적인 제도 개선에 이르지 못했다. 이번에 신규 발의한 개정안은 현재 고시로 허용하고 있는 주방용 오물분쇄기의 신규 제조·수입·판매 또는 사용을 전면 금지한다. 다만 법 시행 이전에 인증제품을 설치한 소비자는 사용을 허용해 불편을 최소화한다고 한다.

이번 하수도법 개정안은 오물분쇄기로 인한 현재 하수도 시스템의 문제를 생각하면 불가피하다. 물론, 오물분쇄기가 주는 편익도 무시하기는 힘들다. 지속적이고 혁신적인 하수도 시스템 개량을 통해, 미래에는 조건이 맞는다면 도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는 오물분쇄기가 일부 소비자에게 주는 편익이 공동체의 건강과 환경에 필수적인 하수도 시스템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협할 수 있으므로, 더 이상 이 상태로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방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