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마감을 끝내고 퇴근 준비를 하려는데, 후배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울기 시작했다. 둘째를 임신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첫째를 낳고 육아휴직에서 복귀한 지 석 달이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첫째를 어린이집에 겨우 떼어내고 회사에 출근하고 있던 후배는 마흔 넘어 갑작스럽게 갖게 된 둘째를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렵다고 했다.
소중한 생명 앞에 마냥 기뻐하지만은 못한 그날의 서글픔은 비단 후배만의 감정은 아니다. 우리는 취직이 늦어졌고, 결혼이 늦어졌고, 부모 되는 나이도 늦어졌다. 우리는 고령아빠, 고령엄마지난 달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 동향에서 '고령산모'로 분류되는 35세 이상 출산이 늘어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올해 1분기 35~39세 여성의 출산율은 1000명당 45.5명을 낳아 전년 동기대비 0.1명 증가했다. 40세 이상 출산율은 3.7명으로 1993년 통계 작성 이후 최고치를 나타냈다. 25세부터 35세 사이 출산율이 급감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엄마 뿐 아니라 아빠가 되는 시기 역시 늦어졌다. 35~54세에 자녀가 태어난 남성을 '고령아빠'라고 분류해 조사한 결과를 보면 고령아빠 비중이 10년 동안 두 배나 뛰었다.
과연 우리는 몇 살까지 아이들을 책임질 수 있을까? 환갑까지 뼈 빠져라 일한들 아이의 결혼 비용, 아니 대학등록금이나 마련해 줄 수 있을까?
198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이탈리아 경제학자 프랑코 모딜리아니의 '생애 주기 가설(Life Cycle Hypothesis)'을 보면 생애 초년기에는 지출이 소득보다 많다가, 중년기에는 소득이 지출을 초과한다. 그러다 노년기가 되면 다시 지출보다 소득이 적어지는 형태로 돌아온다. 버는 돈이 쓰는 돈보다 많은 중년기에 저축을 해놓고, 노년기에는 그동안 축적된 자산으로 소비를 한다는 '은퇴설계의 기본' 중에 기본 이론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소리('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은 말'을 비유하는 표준어)다. 요즘 40대, 50대 중년층은 집 마련 부담에 애들 교육비까지 더해 돈이 남기는 커녕 빚을 지고 사는 경우가 태반이다. 부모가 자녀와 함께 경제 공부, 그 중에서도 돈 공부를 반드시 해야하는 이유다. 내 아이 경제교육, '인생계획 짜기' 부터전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로 꼽히는 덴마크에는 고등학교에 올라가기전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고 탐색할 수 있는 인생학교, '에프터스콜레(Efterskole)’가 있다. 그들이 공부하는 목적은 대학 입시가 아니다. 부모로부터 독립해 세상에 홀로서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
에프터스콜레의 교사는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이들에게 먼저 인생 계획표를 만들게 하세요. 가족과 함께라면 더 좋겠죠."
인터뷰를 보고 난 즉시 아이들과 인생 계획을 짰다. 제일 먼저 아빠, 엄마의 은퇴예상시기를 알려줬다. 아이들에겐 아빠 엄마로부터 독립할 시기를 언제로 할지 목표를 정하라고 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나이를 연도별로 나열한 뒤 인생 이벤트를 적었다. 우린 이것을 '가족 인생 설계도'라고 이름 붙였다.
2021년 아빠 49, 엄마 45, 딸 11...2070년 아빠 98, 엄마 94, 딸 61...이렇게 나열하고 나이 옆에 중학교 입학, 대학교 입학 등의 이벤트를 적는 식이다. 하지만 2070년 이후에는 아빠와 엄마 나이를 적지 않았다. 그땐 아빠와 엄마가 이 세상에 존재할 가능성이 희박할 시기라서 그렇다.
아이들은 연말이 되면 으레 인생 설계도를 만드는 줄 안다. 벌써 4년째 구글 스프레드시트에 업데이트하고 있다. 아이들도 이제 어렴풋이 느끼는 것 같다. 언젠가는 부모라는 둥지가 사라질 것이고 그 때를 조금씩 준비해야한다는 것을 말이다.
인생 계획을 짜는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어떻게 돈을 벌어 먹고 살아갈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가 된다. 매년 두 딸의 장래 희망이 얼토당토않게 바뀔지라도, 아이들이 미래를 꿈 꿀 수 있게 만든다는 것 자체만으로 인생 설계도를 만들 이유는 충분하다.
내 아이를 독립적이고 지혜로운 어른으로 키우기 위해선 경제 공부가 필수다. 그리고 경제 공부의 첫 단계는 인생계획을 짜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인생이 니 맘대로 되냐"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옆에 꼭 있다. 그분들에겐 20여년 전 소개팅남이 거들먹거리며 선물해 줬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권하고 싶다.
니체는 "중력을 거스르고 춤을 추라"고 했다. 삶을 짓누르는 중력에 맞서 춤을 추는 자만이 스스로 인생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고 했다. 내 아이가 순응하는 삶보다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라면, 오늘 당장 가족의 인생 설계도를 함께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
(*자녀 경제교육과 관련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으신 분들은 이메일 주세요. 무거운 고민도 함께 나누면 가벼워지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