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잃어버린 '풍요로운 사회'

입력 2021-06-03 18:00
수정 2021-06-04 00:09
‘풍요로운 사회’라는 용어는 존 갤브레이스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1958년 같은 제목의 책(《풍요한 사회》)을 출간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핵심은 경제가 발전하면서 민간기업이 생산한 것을 모두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공급이 증가하는 풍요로운 사회에 이르게 되고, 이를 해결하려 인위적으로 욕망을 창조하거나 군사적인 해외 진출의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가 발전하던 1950년대 미국에 대한 논의로, 일종의 ‘유효수요 부족’ 이론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갤브레이스는 이를 극복하려면 공적인 서비스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 일견 타당한 부분도 있고, 특히 사람에 대한 투자를 강조한 측면은 지금도 경제성장의 중요한 원천으로 강조되는 인적 자본 축적과 연결된다. 하지만 기본적인 수요 외에 신규 제품 개발과 광고 등으로 창출되는 추가 수요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의 주장처럼 정부의 공적 서비스가 과연 시장을 통해 제공되는 것보다 우월한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1976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 시카고대 교수는 갤브레이스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소비자의 자율적 선택을 강조하는 시장경제 개념에서 벗어나 있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자기 자신보다 정부가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간주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경제적 여유가 한계를 맞이한 데는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이 있었다. 물론 미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여전히 부유했지만 사람들이 다 소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공급이 증가한다는, 갤브레이스 교수가 걱정한 풍요로운 사회는 현실에서 멀어졌다. 스태그플레이션과 함께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어버리는 실업과 높은 가격으로도 물건을 구하기 어려운 물가 상승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동시에 부딪혔다. 용어 자체가 실업을 유발하는 경기침체를 뜻하는 스태그네이션(stagnation)과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라는 점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은 근본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와 거리가 있다. 오히려 궁핍한 사회의 모습이다.

그런데 최근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이 재연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한국은 실질적으로 의미있는 고용이 회복되지 못한 채 식료품과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생활필수품 물가가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기가 회복되면 증가한 수요 때문에 물가가 상승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 경우는 경기회복과 고용 증가가 동반돼 상대적으로 나은 상황이다. 그런데 지금은 고용은 회복되지 않고 물가만 상승하며 세계를 위협하던 1970년대 모습과 비슷하다.

경제 이론상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핵심 원인은 생산비가 급증하는 비용충격과 관련이 높다고 분석된다. 예를 들어 석유파동처럼 어떤 이유로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갑자기 증가했는데, 이를 상쇄할 수 있는 생산성 향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생산은 줄고 가격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정책적 해결이 매우 어려운 게 특징이다.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 통화 공급을 줄이는 긴축정책을 사용하면 고용 사정이 더 악화될 수 있다. 그렇다고 경기 대응을 위해 유동성을 풀며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계속하면 물가 상승으로 생활고가 심해진다.

결국 비용 상승 충격을 가한 원천의 제거, 생산비 증가를 상쇄할 만큼의 생산성 향상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스태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있는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생산성 향상 역시 장기적인 과제일 뿐 급격한 개선을 기대하긴 어렵다. 더구나 시중금리 상승으로 자본 측면에서의 비용도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정책적으로 관리하고 대응할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점검해야 한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부터 경제 전반에 비용충격을 가했던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의 경직적 시행을 포함해 과도하게 노동비용을 증가시켰던 과거의 정책 오류에 대한 세부적인 수정 보완과 전환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