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들이 몰래 돌려보던 작품, '고전'의 반열에 오르다 [김동욱의 하이컬처]

입력 2021-06-04 06:05
수정 2021-06-04 06:11

파리 파리 장미의 도시 파리
파리 파리 봄바람에 실려 오는
파리 파리 달콤한 너의 향기
우리 마음 꿈에 취하게 하는
오오 파리 로즈파리

노래는 대여섯 명에서 일고여덟 명, 나중에는 열두세 명에게까지 퍼져 나가 코러스가 되었습니다.

"시끄러워 죽겠네. 온건파가 또 다카라즈카(소녀들로 구성된 가극단)를 시작했어."

-요시야 노부코 '물망초' 중에서

약간 오글거리기도 하고, 센티멘탈한 게 전형적으로 옛 여고생들이 즐겨 읽었을 법한 학원물입니다. 이 학원물의 시초로 꼽히는 작품이 마침내 고전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을유문화사에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일본의 여성 작가 요시야 노부코(吉屋信子)의 '물망초(勿忘草·ワスレナグサ)'를 최근 번역 출간했습니다. 그것도 셰익스피어와 괴테, 톨스토이 등의 작품과 함께 세계문학전집의 한 자리로 말입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번역된 '물망초'는 ‘백합물(百合物)’이라는, 요즘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장르의 시원이 된 작품입니다. 일본 순정만화의 원류이자, 일본과 한국 로맨스 드라마의 원형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소녀들 사이에 싹트는 미묘한 사랑의 감정, 남성은 존재하지 않거나 연약한 노인이나 소년이라는 조연으로만 간혹 등장하는 그런 세계를 그렸습니다. 근대 일본을 배경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주인공들이 겪는 성차별과 억압, 이를 극복하며 자아를 성장해 가는 과정을 서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름답게 묘사했다고 합니다.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여학생들이 여성 간의 끈끈한 연대의 감정을 느끼면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는 수단이 됐습니다.

문체도 "안 돼요, 나의 정원에 찾아온 손님을 쏴서는…"처럼 현실과 한 발 떨어진 듯한 느낌이 물씬 묻어납니다.

전통적으로 문학 관념에선, '소녀'라는 용어는 왠지 미숙하고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느낌을 떠올렸던 게 사실입니다. '소녀 취향' '소녀 감성' '문학소녀'라는 용어는 이런 고정관념을 반영합니다.

그런 까닭에 기성세대 여성분들은 학창 시절 학교에서 이런 학원물들을 몰래 돌려보곤 했다고 하는데요. 정식 문학작품으로 대접받지 못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감성적인 여학생들이나 보는 '하급 장르'로 여겨지던 소설들이 정식 고전으로 평가받는 때가 됐습니다.

세계는 끝없이 변화해 나가고, 가치도 계속해서 바뀌어 나가는 것 같습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