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을 시작으로 암호화폐 열풍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암호화폐로 결제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투자자에게 암호화폐는 여전히 단순한 투자수단이다. “암호화폐의 사실상 유일한 사용처는 자금세탁”이라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하지만 암호화폐가 메타버스와 만나자 얘기가 달라졌다. 가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메타버스의 세계에서 암호화폐는 결제수단으로 쓰이며 새로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로블록스 제페토 등 메타버스 플랫폼도 독자적인 디지털 화폐를 활용해 영토 확장에 나서고 있다. 로블록스 1분기에만 7000억원 결제메타버스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메타버스는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생)의 놀이터일 뿐”이라고 말한다. 가상세계에서 하는 것이라고는 게임하고 친구를 만들고 공연을 즐기는 것 정도라고 지적한다. 이들이 간과한 게 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경제활동이다.
5500만 개 이상의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메타버스 플랫폼 로블록스가 대표적 사례다. 이 플랫폼 안에서 게임 아이템 구입을 포함한 모든 거래는 ‘로벅스’라는 디지털 화폐로 이뤄진다. 로벅스 결제액은 올 1분기에만 6억5230만달러에 달했다.
로블록스에선 이용자들이 메타버스 내 게임을 직접 제작해 팔 수도 있다. 게임 개발자는 창작의 대가로 로벅스를 받는다. 지금까지 1만달러 이상 번 개발자가 1000명을 넘는다. 미국의 알렉스 발판츠라는 소년은 고교 3학년 때 ‘탈옥수와 경찰’이란 인기 게임을 개발해 매달 약 25만달러를 벌고 있다.
네이버의 제페토, 에픽게임즈의 포트나이트 역시 각각 젬, 브이벅스 등 자체 디지털 화폐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디지털 화폐로 거래되는 건 주로 게임 아이템, 아바타(분신)를 꾸미는 옷 등이지만 점차 실제 의류, 명품 등 거래도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암호화폐로 가상 부동산 거래도고도화된 경제 활동이 이뤄지는 메타버스도 있다. ‘디센트럴랜드’가 대표적이다. 디센트럴랜드엔 싱가포르 6배 정도 크기의 ‘랜드(LAND)’라고 불리는 가상 부동산이 있다. 사용자는 ‘마나(MANA)’라는 코인으로 랜드를 사고팔 수 있다. 땅을 산 뒤에는 원하는 건물을 올릴 수 있고, 이를 거래하기도 한다.
마나는 단순한 게임 코인이 아니다. 이더리움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정한 표준 ‘ERC-20’이 적용된 암호화폐다. 랜드의 소유권 역시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한 ‘대체 불가능 토큰(NFT)’으로 기록된다. NFT는 디지털 자산의 소유권과 가치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며 분산 원장 기술이 적용돼 데이터 위·변조가 불가능하다.
NFT 분석 사이트 넌펀저블닷컴에 따르면 디센트럴랜드의 랜드 한 개 평균 가격이 2019년 780달러에서 올해 2700달러로 뛸 전망이다. 최근엔 랜드 하나가 70만달러(약 8억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NFT는 가상의 대상을 자산화할 수 있고,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자산을 안전하게 평가·구매·교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메타버스 안에서 활용도가 갈수록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메타버스 안에서 공들여 만든 캐릭터를 NTF로 변환해 거래하는 것도 가능해질 전망이다. 네이버는 지난달 블록체인 업체 더샌드박스와 손잡고 제페토 내 캐릭터와 아이템 등을 NFT로 발행하는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알파고 대국 NFT 2억원에 거래
NFT의 영향력은 현실 세계로 넘어오고 있다. NFT ‘크립토키티’의 제작사 대퍼랩스는 NBA 경기 장면을 NFT로 만든 ‘NBA 톱샷’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달 18일엔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AI) 알파고를 이겼던 대국 동영상이 NFT로 발행됐다. 이 작품은 경매에서 2억5000만원에 낙찰됐다. 국내 기업도 NFT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카카오는 지난 3월 자사의 블록체인 플랫폼 클레이튼에서 NFT를 거래할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NFT 시장도 급격히 팽창하고 있다. 넌펀저블닷컴에 따르면 NFT 시장 시가총액은 2019년 1억4155만달러에서 작년 3억3803만달러로 커졌다.
하지만 NFT 시장이 과열 조짐을 보이자 경고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자신과 친구의 방귀 소리를 NFT로 제작해 수십만원에 판매한 미국 영화감독 알렉스 말리스는 “NFT 열풍은 터무니없다”며 “광란의 시장 이면엔 빨리 부자가 되고 싶은 투기꾼이 있다”고 비판했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