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에 칼 대지 않고 '간질 DNA' 찾는다

입력 2021-05-28 17:07
수정 2021-05-28 23:42
“악마의 저주가 원인이다.”

‘뇌전증’은 이른바 ‘간질’로 잘 알려진 만성적 뇌 장애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는 특히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반복적인 발작을 동반하는 탓이다. ‘믿음이 부족해 생기는 병’이라는 악명으로 인류와 함께한 뇌전증은 여전히 전 인구의 약 1%에게 발병하는, 생각보다 흔한 질환이다.

뇌세포의 신호 기전이 밝혀진 현대 사회에서도 뇌전증은 까다로운 존재다. 진단과 치료 모두 어렵다. 사람의 뇌는 수백억 개의 신경 세포를 갖고 있다. 세포들은 전기적 신호를 통해 활동하는데, 뇌전증은 이 신호를 적절히 조절하지 못해 발생한다. 자연히 어느 부위에서 어떤 원인으로 질환이 발생하는지 특정하기 어렵다. 통상 항경련제 등의 약물로 증상에 대응할 뿐이다.

하지만 약물마저 듣지 않는 ‘난치성 뇌전증’에 해당하면 두개골을 열고 뇌에서 병변 부위를 잘라내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다. 국내 환자의 25%, 약 9만 명이 속한다. 하지만 머리를 여는 ‘개두 수술’은 또 다른 뇌 질환을 부를 위험성이 크다. 이 때문에 그간 절개 부위를 최소화하는 뇌전증 진단 방식이 의과학계의 화두였다.

이정호 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 연구팀은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 뇌연구센터와 함께 뇌척수액을 통한 난치성 뇌전증의 새로운 진단법을 개발했다고 28일 발표했다. 수술 없이 척추에 간단한 주사를 삽입하는 것만으로 난치성 뇌전증을 진단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연구팀은 인간의 뇌척수액에서 극미량의 원인 유전자를 검출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뇌는 다른 장기와 달리 혈관 장벽이 두꺼워 머리를 열고 조직을 절제하지 않으면 유전자 검사가 어렵다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연구팀은 세포가 괴사했을 때 단편적으로 잘려 나오는 ‘세포 유리 DNA’를 활용했다. 죽은 뇌세포가 척수액에 남기는 흔적을 추적한 것이다. 난치성 뇌전증 환자에게서 평균 0.57% 존재하는 돌연변이 원인 유전자를 해당 DNA만으로 잡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관련 논문의 제1저자인 김세연 연구원은 “극미량의 DNA를 검출하는 데 사용하는 효소의 디지털 연쇄반응을 이용했다”며 “머리를 열지 않고도 원인 인자를 알 수 있어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고, 맞춤형 약물 투여가 가능해져 비수술 치료 또한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술 방식도 진화하고 있다. ‘로봇 의사’를 통해 머리를 여는 부위와 수술 시간을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지난달 세브란스병원은 국내 최초로 로봇을 이용한 난치성 뇌전증 수술에 성공했다. 장원석 세브란스병원 신경외과 교수, 강훈철·김흥동 소아신경과 교수팀이 국내 첫 뇌수술 로봇장비인 ‘카이메로’를 이용해 10세 여아의 병변 발생 부위를 제거했다.

카이메로는 바늘 모양의 전극을 활용해 두개골을 여는 시간을 줄인다. 머리뼈에 2~3㎜의 작은 구멍을 뚫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머리를 열고도 정확한 수술 부위를 찾는 데 4~5시간 걸리던 작업이 1시간 반으로 줄었다. 통증이 대폭 줄어들고, 뇌출혈이나 언어 장애 등 부작용도 최소화했다는 설명이다.

장 교수는 “그간 국내 난치성 뇌전증 진료 방식은 수술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돼 병변 부위를 제거하지 못한 채 발작을 안고 살아가는 환자가 많았다”며 “로봇 수술 활용은 약물에만 의존하던 기존 치료 방식을 바꾸는 데 획기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