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 "첫 직장 인사평가 C등급 받아 좌절 대신 날마다 일어서는 연습"

입력 2021-05-23 17:41
수정 2021-05-24 00:19
“26세 때 세계 최고 반도체 엔지니어가 되는 꿈을 꿨어요. 하지만 항상 메이저가 아니라 마이너였죠. 마이너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독하게 공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지난 21일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사진)은 서울대 경력개발센터에서 개최한 ‘동문 선배 초청 특강’에서 “살면서 수많은 좌절감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후배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사장은 이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SK하이닉스 회사 소개 등을 하고 학생들과 질의응답 시간도 보내며 80분간 강의를 온라인으로 풀어나갔다.

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 84학번인 이 사장은 강연 초두에 “지금은 반도체 회사 사장이지만 살면서 메이저가 된 기억은 없었다”고 했다. 대학 전공은 전자공학이 아니었고, 석사논문도 비반도체였다는 것이다. 그는 “병역특례로 입사한 첫 직장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에서도 연구소가 아니라 공정기술부에 배치받았고, 심지어 첫 인사평가는 ‘C등급’이었다”고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

마이너였던 이 사장은 어떻게 메이저로 올라섰을까? 그는 “기숙사에 살면서 매일 새벽까지 반도체 관련 해외 논문과 자료를 읽었다”고 했다. 처음 논문 한 편을 읽는 데 1주일 이상 걸렸지만 나중엔 퇴근을 앞둔 짧은 시간에도 한 편을 읽는 수준까지 올라 200편 이상을 읽게 됐다고 했다. 이런 논문 읽기 덕에 입사 5년차 대리 시절 현대전자 창사 이래 처음으로 반도체 디바이스 국제학회인 IEDM에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세계 최고 반도체 기업인 인텔에 입사했다.

이 사장은 인텔에서도 여전히 마이너였다고 한다. 반도체 트랜지스터 개발업무 대신 ‘몸만 힘든 부서’에 배치받았다. 그는 또 지독하게 공부했다. 이 시절 얻은 이 사장의 별명은 ‘회사에서 먹고 자는 사람’ ‘맡은 일은 깔끔하게 완결하는 사람’이었다.

1년에 최고기술자 한 명에게만 주는 인텔 기술상(IAA)을 세 번이나 받은 이 사장도 ‘인텔을 그만둬야 하나’라는 좌절의 시기가 있었다. “8인치 웨이퍼(반도체 원판)를 12인치로 전환하는 시점에 12인치 웨이퍼 팹(fab)에 배치받았습니다. 그런데 웨이퍼가 계속 깨지는 현상이 발생했죠. 회사에선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원인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회사와 차로 15분 거리에 집이 있던 이 사장은 한밤중에라도 문제가 생겨 삐삐가 울리면 달려가야 했다. 거의 매일 그렇게 하다 보니 회의가 밀려왔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 사장은 “모든 장비의 문제와 해결책을 사내 인트라넷에 공개해 모든 사람이 해결할 수 있도록 프로세스를 개발했다”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몸이 고된 이 일은 내게 엄청난 축복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온라인에 접속한 대학생들에게 “아마도 졸업 후 접하게 되는 대부분 일은 단순하고 몸만 고된 일일 수 있다”며 “하지만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위기가 축복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사장은 KAIST에서 교수로 근무하다 2013년 SK하이닉스 미래기술연구원 원장으로 입사한 후 2년마다 승진을 거듭했다. 2014년 DRAM개발사업부문 부문장, 2016년 사업총괄 최고운영책임자(COO), 2018년 12월에는 SK하이닉스의 CEO가 됐다. 이 사장은 “제가 꽃길만 걸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다시 날마다 일어서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래 사회는 쉽게 풀 수 없는 문제의 연속”이라며 “어떻게 어려운 문제를 풀까를 고민하고 때론 주위 선배들께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후배들이 되길 바란다”며 강의를 맺었다.

공태윤 기자 true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