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빠진 글로벌 원전 시장에서 중국, 러시아가 수주를 싹쓸이하고 있습니다.”
한 원전업계 관계자는 정부의 탈원전 정책 영향으로 한국의 뛰어난 원자력 기술이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탈원전 정책의 늪에 빠져 있던 원전업계에 낭보가 날아들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해외 원전시장 진출을 위한 상호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다.
한국과 미국 중 한 국가가 세계 무대에서 원전 사업을 수주하면 양국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설계 등 원천기술을 보유한 미국과 시공 능력, 공급망을 갖춘 한국의 힘이 합쳐지며 강력한 ‘원전 동맹’이 탄생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에너지업계는 이번 한·미 원전 동맹에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한국 정부가 미국과 함께 원전 수주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차세대 원전으로 각광받고 있는 ‘소형 모듈원전(SMR)’에 대한 연구 지원과 기술 개발에도 도움이 될 전망이다. 미국은 향후 7년간 SMR 기술 개발에 총 32억달러를 쏟아붓기로 하는 등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원전 수출을 위한 시장 환경도 나쁘지 않다.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등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원전 발주가 잇따르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의 직접적 피해를 받은 동유럽 국가들도 앞다퉈 원전 확대에 나서고 있다. 6기 원전을 짓기로 한 폴란드를 중심으로 체코, 리투아니아, 불가리아 등이 발주한 원전이 20기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들 국가는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는 데 힘쓰고 있다. 한·미 원전 동맹에 유리한 대형 시장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이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동유럽 국가들이 원자력을 추구하는 것은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면서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며 “한국엔 원전을 수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다만 정부는 미국과의 공동 원전 세일즈 전략을 브리핑하며 국내에서 신규 원전을 짓지 않는다는 방침은 변한 게 없다고 선을 그었다. 현 정부의 정책 기조인 탈원전 아젠다는 국내에서 고수하겠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 에너지업계에선 이참에 탈원전 정책 자체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이 탄소중립을 선언하면서 일제히 원전 활용도를 높이고 있는 이유를 살펴야 한다는 점에서다.
또 이번 원전 동맹이 실질적 원전 수주로 이어지기 위해선 정부의 정책 변화를 통해 고사 위기인 국내 원자력 공급망을 되살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에선 원전을 못 짓게 하면서 해외에서 원전을 짓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많다. “탈원전과 탄소중립을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거짓말은 이제 중단해야 한다”는 에너지 전문가들의 고언(苦言)을 정부 관계자들이 곱씹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