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교체는 정치권의 영원한 화두다. 나라와 시대 불문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세대교체 바람이 몰아친 때는 1970년이다. 당시 신민당 내에서 김영삼·김대중·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로 바람을 일으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43세, 김대중 전 대통령이 46세, 이철승 전 의원이 48세였다.
당시 신민당은 기로에 서 있었다.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 연장을 위한 3선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신민당은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무위로 돌아가면서 무력감에 휩싸였다. 아래로부터 쇄신 요구가 거세게 일었다. 40대 기수론이 나온 배경이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는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기자 회견을 통해 당 후보 지명전 출마를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씨의 3선 개헌으로 빈사 상태에서 헤매는 민주주의를 기사회생시키는 데 새로운 결의와 각오로 앞장서겠다.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렸다.”
이에 김대중 신민당 의원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정치적 선수(先手)치기였다”며 뒤늦게 ‘40대 기수론’에 동승했다. 이에 유진산 신민당 총재는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 정치적 미성년자들이 무슨 대통령이냐”고 비난했다. 하지만 ‘진산 체제’라는 낡은 질서는 세대교체 열기를 막지 못했다.
이후 우리 정치권에서 1990년대까지 40대 기수론은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가 2006년 열린우리당 김부겸·이종걸·김영춘 의원 등이 당권에 도전하면서 40대 기수론이 부활했다. 이어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송영길 인천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이광재 강원지사 등이 광역단체장 도전에 성공하면서 40대 기수론을 이어 갔다. 이듬해 나경원?남경필?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 경선에 나서면서 40대 기수론이 다시 회자됐다. 하지만 중진의 벽에 부닥쳐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보수 정당에서 보기 드문 ‘3040 기수’…“구상유취” “돌풍” 40대 기수론은 10년 지나 다시 바람이 불고 있다. 국민의힘 대표 경선에 정치 신인들이 도전하면서다. 초선 등 신진 대 50~60대 중진 대결 구도가 뚜렷해졌다. 나경원·주호영 전 원내대표, 조해진·홍문표·조경태·윤영석 의원, 신상진 전 의원 등 중진과 이준석 전 최고위원, 초선인 김은혜·김웅 의원 등 3040 세대 신인들이 출사표를 던졌다. 신인들은 ‘얼굴 마담’이나 ‘들러리’가 아니라 이번엔 만만치 않은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 등이 5월 17~19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민의힘 대표 선호도 조사에서 이 전 최고위원이 19%, 나 전 원내대표는 16%로 나타났다. 주 전 원내대표는 7%, 김웅 의원과 홍 의원은 4%, 조 의원과 김은혜 의원은 2%를 각각 기록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윈지코리아컨설팅이 아시아경제 의뢰로 5월 15~16일 전국 성인 남녀 1019명에게 국민의힘 당 대표 적합도를 조사한 결과, 이 전 최고위원은 17.7%, 나 전 원내대표는 16.5%를 각각 기록했다. 주 전 원내대표는 10.4%, 김웅 의원은 8.2%를 각각 차지했다. 다른 조사에서도 30대인 이 전 최고위원이 정치 거물 나 전 원내대표와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선전하고 있다. 막판 정치 신예인 이 전 최고위원과 김웅·김은혜 의원의 단일화 얘기까지 나오고 있어 중진은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다.
국민의힘 내부에선 신인들의 활약에 기대를 걸고 있다. 우선 대표 경선에서 흥행을 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불어민주당과 대조된다. 민주당은 지난해 대표 등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한 ‘8·29 전당대회’에서 ‘이낙연 대세론’에 묻혀 흥행이 저조했다. 올해 ‘5·2 전당대회’도 ‘4·7 재·보궐 선거’ 참패 직후인 데다 신예들이 전혀 보이지 않아 여론의 주목을 끄는 데 실패했다.
보수 정당에서 그간 정치 신인들이 좀체 바람을 일으키기 어려웠는데 이번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뭘까. 정치 평론가인 서성교 건국대 초빙교수는 △기성 보수 기득권 정치인에 대한 실망 △2030 청년 세대의 중도화·스윙보터화 △내년 대선을 앞두고 새롭고 깨끗한 신진 보수 인물과 세력에 대한 희구 △구시대 지역에 기반을 둔 진영 정치 탈피 열망 △새로운 정치 방식과 국가 운영 모델 요청에 대한 부응 등을 꼽았다.
관건은 신인들이 단순히 나이만 젊고, 패기, 의욕만이 아니라 정치 콘텐츠를 얼마나 갖췄고 시대 변화에 맞는 비전과 리더십을 보여주고 보수의 가치를 제대로 제시할 수 있느냐다. 정치 리더십은 하루 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2~3년 전 세대교체 바람을 몰고 온 유럽 등 젊은 정상들은 10~20대 때부터 정당에 가입, 지방 의원에서 출발해 경력을 차곡차곡 쌓은 뒤 중앙 정치 무대에 데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이는 30~40대이지만 정치 경력이 20년 안팎인 ‘준비된 리더’들이다. 유럽 젊은 지도자들, 밑바닥부터 정치 경력 쌓아국민의힘 정치 신인들이 롤 모델로 꼽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벤처기업형 새 정치 실험’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프랑스인들의 ‘데가지즘(degagisme : 구체제나 구 인물 청산)’ 열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마크롱 대통령이 정치 밑바닥에서 시작해 단기간에 거대 정당을 제치고 의회 권력까지 거머쥔 배경에 대해 “‘행운’뿐만 아니라 ‘개인기’가 39세에 대통령이 되게 했다”고 분석했다.
대선 과정에서 유력 경쟁자가 부패 혐의로 무너진 덕을 본 것도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마크롱 대통령이 시대를 잘 읽고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경제 등 전문 분야 경력도 쌓았다. 젊지만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의미다. 마크롱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산별 노조가 아니라 개별 기업 노조와의 직접 교섭권 보장 등 노동 시장 개혁 △법인세 인하 등 세제 개편 △5년간 정부 지출 600억 유로 축소를 비롯한 재정 건전화 등 개혁 정책을 곧바로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공무원 축소, 철도공사 등 공기업 개혁, 연금 개혁 등을 단호하게 추진하는 리더십도 보였다.
세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는 20대 초반에 국민당 청년조직 대표를 시작으로 빈 시의회 의원을 지낸 뒤 27세에 외교부 장관에 발탁됐고 31세에 총리가 됐다. 50세인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도 30대 때 주 하원의원으로 출발해 정치 경력을 쌓은 뒤 44세에 총리에 올랐다.
그에 비해 국민의힘 신인 대표 도전자들의 정치 경력은 일천하다. 물론 정치 경력을 많이 쌓았다고 해서 좋은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가 되려면 전문성에 더해 리더십 훈련은 필수 과정이다. 다만 국민의힘 젊은 대표 후보들이 정치 거물의 후광 또는 계파를 업은 ‘꽃가마 태우기’, ‘인큐베이팅’ 식이 아니라 스스로 도전에 나선 것은 긍정적으로 볼 만하다.
그러나 보수 지도자로서 마크롱 대통령의 노동 개혁, 공공 개혁, 법인세 인하 등과 같은 국민 요구에 부응하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정책 비전을 보여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2030세대 대책과 관련, 국민의힘 젊은 후보들도 기본소득을 주자는 등 ‘퍼 주기 포퓰리즘’에 편승하고 있는 것이나 여성 할당제와 가산점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은 한계다.
청년들의 근본적이고 본질적 문제인 일자리 창출 등에 대한 담론은 별로 없다. 징벌적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부동산 세제와 기업 규제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젊은 후보들까지 특정인에 기대는 ‘윤석열 마케팅’에 나서는 것도 썩 보기 좋지는 않다. 국민의힘 ‘젊은 보수’도 전망이 밝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홍영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