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봄, 초대장이 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달라는 거였다. 발신인은 국가보훈처장 피우진이었다. 내 모친이 항일독립투사인 내 외조부의 첫째 자식이고, 나는 내 모친의 첫째 자식이다. 나는 4월 11일 그 기념식장에 가지 않았다. 뭐든지 오용하고 악용하는 정치인들이 싫어서였다.
역사가 정치가 되는 것을 극혐했던 이는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가 화려한 마차를 타고 웨스트민스터로 향하는 등의 영국 왕실 전통은 천년을 이어져온 게 아니다. 19세기 후반에 창작된 쇼다. 스코틀랜드의 격자무늬 킬트도 18,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홉스봄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국경일, 의례, 영웅, 상징물들이 국민국가의 권위를 위한 정치적 의도로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생산됐고, 이것을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명명했다. 1870년과 1914년 사이의 신생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도 이 영국식 모델을 따라했다.
일본 천황에 관한 많은 것들도 국민국가 건설을 위해 일본 근대 정치인들이 급조한 것이다. 지금 나는 ‘만들어진 전통’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시간’과 ‘인간의 뇌’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쌍팔년도’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1988년’이라고 생각한다. 실상 이는 단기 4288년, 즉 개천절인 BC 2333년에 1955년을 더한 해를 가리키는 것이다. ‘쌍팔년도 학번’은 88학번이 아니라 55학번이 맞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사람들은 원래부터 이런 줄 믿고 살아가고 있다. 러시아 전통인형 마트료시카는 1890년 일본 목각인형 고케시를 본뜬 것이다. 베트남 전통의상 아오자이는 1930년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우리는 서양결혼식이 한반도에 들어온 후 줄곧 신부가 부케를 등 뒤로 던졌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 이런 예는 끝이 없다. 감각하고 있는 역사와 사실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이 현상은 인위적으로, 혹은 우연히, 혹은 둘 다가 뒤섞여 만들어진다. 현재로 미래를 함부로 상상하는 것보다, 현재로 과거를 함부로 규정하는 게 더 위험하다.
‘그들’의 적이 전두환 파쇼 군사정권이었다고 해서 그들이 주사파 파시스트에서 자유민주주의 투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산업화 끝에 비로소 경제적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적합하게 성장한 대중의 폭발을 파도 타고 ‘대통령 직선제 슬로건’과 ‘87체제’ 속으로 스며들어, 많은 일제 친일파 매국노들이 해방 뒤 애국자로 변신했듯 신분을 세탁했다. 그래서 이들이 대한민국 헌법에서 그토록 간절하게 ‘자유’라는 두 글자를 삭제하려는 것이다.
진실의 나무에 거짓의 열매가 버젓이 열리는 세상. 사람이 가장 외로울 때는 세상만사가 다 사기처럼 느껴질 때다. 백범과 임시정부를 쓰레기 취급했던 것이 김일성이고, 그 4월 그 기념식장에 적잖았을 과거와 현재의 주사파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안 갔다. 일제 중추원 참의의 손자 ‘같은’ 자들이 항일독립투사의 장손자인 내게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나라에 나는 살고 있다.
내 지인들이 내 외조부에 관해 알게 된 것은, 전형적인 나치 파시스트들의 수법인 ‘토착왜구’라는 말이 사용되고부터다. 내가 밝히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한 것은 내 외조부이지 늘 삶 앞에서 흔들리고 부끄러운 내가 아니다. 나는 역사가 무섭고, 역사에 개입하려는 자들의 욕망이 복날 파리 떼가 내려앉은 생선을 보는 듯하다. 베드로조차 예수를 부인했다는 사실 앞에서 겸손할 필요가 없는 인간은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총 들고 나가서 싸우는지는 그때 가봐야 알 일이다. 온갖 유공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 사회는 왜 이 모양인가.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인간이 무언가를 위해 죽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진실인 것은 아니다”라고. 게다가 지금 거짓 덕에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자들은 죽은 자조차도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