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2만여 개 플라스틱 제품 제조업체들이 최근 원자재 가격 급등과 중국발(發) 수급 대란에 이은 정부의 관세 부담까지 겹쳐 극심한 운영난에 빠져들고 있다. 일부 업체는 비용 증가를 감당하기 어렵다며 공장 가동을 중단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호소하고 있다. 플라스틱 제품 제조업체들은 정부를 상대로 관세만이라도 한시적으로 폐지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포장재 ‘공급 절벽’ 사태 우려국내 석유화학 대기업들이 원유를 정제해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에틸렌을 제조하면 플라스틱 제조업체가 이를 가공해 전기·전자부품 등 각종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한다. 주요 합성수지 제품인 저밀도폴리에틸렌(LDPE)은 식품·생활용품 포장재, 농업용 비닐하우스(필름), 전기자동차 배터리의 전극 보호제, 플라스틱 병뚜껑 등 다양한 곳에 쓰인다.
플라스틱 제품 제조의 기초가 되는 국제 유가(미국 서부텍사스원유)는 지난 3월 배럴당 60.97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109% 급등했다. 4월 기준 LDPE 가격은 t당 1521달러로 1년 전(850달러)보다 두 배 가까이 뛰었다. 시화산업단지의 한 플라스틱 제조업체 사장은 “이대로라면 오는 7~8월 공장 가동률이 50%대로 떨어질 것”이라며 “팔면 팔수록 손해인데 누가 공장을 가동하겠냐”고 토로했다.
국내 플라스틱 제품 제조업체는 2만943개로 99%가 중소기업이다. 종사자는 23만6222명, 연간 생산액은 56조원에 달한다. 플라스틱 제조업체의 공장 가동률은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지난해에도 평균 90%대를 유지했다. 하지만 비닐 포장재에 들어가는 LDPE 관련 제조업체를 중심으로 이달 80%로 떨어진 상태다.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플라스틱으로 제조하는 반도체·전기·전자부품, 자동차부품, 건축자재, 기계장비 시장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양순정 플라스틱제조업협동조합 상무는 “LDPE를 주문하면 두 달 뒤에야 도착할 정도로 수급 상황이 심각하다”며 “수주한 플라스틱 제품조차 납품이 어려워 추가 수주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관세까지…엎친 데 덮친 격플라스틱 제조업계는 정부의 관세 정책 변화도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는 2019년까지 LDPE에 대해 수입량 전량에 ‘할당관세’를 적용했다. 할당관세란 산업경쟁력 강화나 물가 안정 목적으로 한시적으로 기본 관세율을 높이거나 낮출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중간재로 많이 쓰이는 LDPE의 특수성을 고려해 자동차부품 및 전기·전자부품의 수출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할당관세를 적용한 것이다. 플라스틱 제조업체들은 8%의 관세를 부담하지 않고 무관세로 수입할 수 있었다.
작년부터 정부는 LDPE에 대해 수량을 한정해 할당관세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LDPE의 수입 물량 비중을 줄이고 국내 생산을 장려하기 위한 조치다. 작년 10만2000t, 올해 9만1800t 수준으로 기존 수입량 수요의 60% 수준만 무관세 혜택을 주고 있다.
중소기업계엔 이 같은 정부의 조치가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는 분석이다. 플라스틱 제조업계의 상황이 악화하면서 중소기업중앙회는 이달 초 정부에 LDPE 수입량 전량에 할당관세를 적용해줄 것을 건의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이를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에 전달해 현재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환 중기중앙회 국제통상부장은 “중소기업의 45.3%가 판매 가격에 원자개 가격 상승분을 반영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국내 중소기업이 원자개 가격상승과 공급부족에 대응하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