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마케팅'이 끝내 오너를 울렸다.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사진)은 지난 4일 본인의 사퇴와 함께 경영권 세습 포기를 선언했다. 불가리스 사태가 불거진 지 3주 만에 "책임을 지겠다"며 눈물과 함께 퇴진한 것이다.
홍 회장의 결정으로 2013년 이른바 ‘대리점 갑질’ 사태로 시작된 소비자들의 남양유업 제품 불매운동을 멈출 수 있을까. 재계 안팎에서는 리스크 관리의 실패와 경영 쇄신 방안 부재를 짚으며 보다 강력한 개선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제기했다.홍원식 회장 사퇴에도…경영쇄신 방안은 '갸웃'
홍 회장은 불가리스 사태에 책임을 지고 본인과 자식의 경영권 배제 결정을 약속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만 이같은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한 경영쇄신 방안은 별도로 내놓지 않았다.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코로나 시대 항바이러스 식품개발' 심포지엄이 열린 지 3주 만에 입장을 내놨지만 늑장 대응이란 비판과 함께 사실상 현상 유지일 수 있다는 회의적 시각까지 나오는 이유다.
업계 안팎에서는 불가리스 코로나19 마케팅으로 남양유업이 1964년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리점 갑질 사태가 표면화된 2013년부터 반복된 수차례 고비에도 리스크 관리 노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홍 회장은 이번 사퇴를 계기로 "살을 깎는 혁신을 통해 새로운 남양을 만들어 갈 우리 직원을 다시 한 번 믿어주고 성원해 달라"고 했지만, 남양유업은 구체적 재발 방지 계획을 위한 계획은 제시하지 않았다.
앞선 3일 사임 의사를 밝힌 이광범 남양유업 대표의 공석을 메우는 후속 과정이 필요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별도 언급은 없었다. 전문경영인 영입이나 내부 승진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 회장이 이미 대외적으로는 2003년부터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상황인 만큼 이번 사퇴가 실효성이 크지 않은 조치였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남양유업은 국내 기업의 리스크 관리 실패 대표사례로 꼽힌다"며 "지금까지 여러 불거진 문제점을 과감하게 떨쳐버릴 수 있는 새로운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지배구조 체제 역시 내부적으로 큰 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양유업은 오너 일가의 지배력을 바탕으로 한 '톱다운' 방식의 폐쇄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꾸준히 지적을 받았다. 남양유업의 최대주주인 홍 회장(지난해 말 기준 51.68%)과 부인, 동생, 손자 등 오너 일가 주식을 합하면 지분은 53.08%에 달한다. 또 지분을 보유하지 않은 홍 회장의 장남인 홍진석 상무(기획마케팅총괄본부장)와 차남인 홍범석 외식사업본부장이 경영에는 참여하고 있었다. 장남인 홍 상무는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는 데다 회삿돈 유용 의혹을 받아 지난달 보직 해임된 상태다.
쇄신을 위해선 현재 구성원의 3분의 2가 오너 일가 측인 이사회 재정비가 필요하다. 남양유업 이사회는 현재 사내이사 4명과 사외이사 2명으로 구성돼 있다. 홍 회장과 홍 회장의 모친 지송죽 씨, 홍 회장의 아들 홍진석 상무가 사내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나머지 한 명은 사임 의사를 밝힌 이광범 대표다.
안승호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는 "이번 사례로 남양유업의 내부통제 시스템이 무너졌다는 점이 드러났다. 제왕식 경영의 폐혜로 사외이사 등 '제3의 시각'을 통한 견제 기능이 작동되고 않았다"고 평가했다.
남양유업은 조만간 이사회를 열어 후속 조치를 논의할 계획이나 일정은 미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광범 대표는 이사회에서 차기 대표가 선임될 때까지 대표직을 유지할 전망이다. 8년간 이어진 불매운동…소비자 마음 돌리려면?
홍 회장의 사퇴와 경영세습 포기 선언이 얼어붙은 소비자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코로나19 마케팅 무리수는 남양유업 불매운동에 다시 한번 불을 붙였다. 업계 안팎에선 소비자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이번 대응이 너무 늦은 점과 구체적 실행계획(액션플랜)을 담고 있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2013년 대리점 갑질 사태로 시작된 불매운동은 남양유업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으면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흔히 맘카페라 불리는 지역 커뮤니티에서는 남양유업 제품에 대한 정보를 나누며 불매운동을 하자는 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남양유업이 대형마트와 편의점 등의 자체브랜드(PB) 제품으로 제조사를 잘 드러내지 않는 전략을 취하자 '가려내기' 정보를 공유했다. 재테크 카페의 한 누리꾼은 "남양유업 주식도 불매한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남양유업은 2013년 대국민 사과까지 했지만 이후에도 대내외 문제가 불거졌다. 지난해에는 홍 회장을 비롯한 임직원이 온라인에 경쟁사 매일유업에 대한 비방글을 올리도록 한 것으로 드러나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되기도 했다. 남양유업은 앞서 2009년과 2013년에도 경쟁사 비방글을 올려 경찰 조사를 받은 바 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소비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선 단순히 사과와 사퇴 뿐 아니라 개선 의지를 뒷받침하는 쇄신안, 사재 출연 등 구체적 대응방안이 뒤따랐어야 한다는 진단이다.
이정희 교수는 "코로나19를 부적절하게 이용한 사안인 만큼 코로나19 퇴치를 위한 사회에 기여하는 실질적 노력 등이 보였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정민 한경닷컴 기자 bloom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