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내가 만든 세상-제주전', 혐오 넘어 공감으로…제주서 전하는 화해의 메시지

입력 2021-05-04 17:22
수정 2021-05-05 02:24

“게으르고 잔꾀가 많은 그들이 우리 돈을 갈취해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 언론을 장악해 우리를 조종하고 있습니다”….

벽에 뚫린 수많은 구멍 속에 각각 혐오와 저주의 선동 문구가 담겨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축출하기 위해 퍼뜨린 유언비어를 비롯해 역사 속 가짜뉴스를 모아놓은 ‘소문의 벽’이다. 이곳을 지나면 어두운 공간이 나온다. 바닥에는 조금 전 벽에서 봤던 문구가 투사돼 흐르고 있다. 관람객이 글자 위에 올라서면 관람객의 형상을 한 가짜뉴스가 벽면에 비친다. 평범한 사람도 언제든 가짜뉴스를 만들고 퍼뜨리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선사하는 인터랙티브 작품 ‘비뚤어진 공감’이다.

지난달 24일 제주도 서귀포에 문을 연 ‘포도뮤지엄’에서 편견과 혐오의 해악을 고발하는 티앤씨재단의 전시 ‘너와 내가 만든 세상-제주展(전)’이 열리고 있다. 각종 조각 및 설치 작품과 생생한 인터랙티브 전시 공간을 통해 역사 뒤편에 숨겨진 혐오와 이를 극복하는 의인들의 메시지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말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열린 서울 전시를 확대 및 개편한 것이다. 기존 전시 작가인 강애란, 권용주, 성립, 이용백, 최수진, 구와쿠보 료타에 장샤오강과 진기종이 합류해 한·중·일 작가 8인전이 됐다. 회화와 설치, 미디어, 조각, 드로잉 등 20여 점을 선보이고 있다. 작품 맥락에 맞게 전시장 곳곳에 티앤씨재단이 기획한 ‘소문의 벽’ 등 인터랙티브 공간이 설치돼 있어 몰입감을 더한다. 김희영 티앤씨재단 대표는 “관람객들이 혐오와 차별의 해악성을 돌아보고 공감과 화합의 메시지를 나눴으면 한다”고 말했다.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은 권용주 작가의 ‘계단을 오르는 사람’과 ‘매달린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목 위에 얼굴 대신 연기를 내뿜는 긴 굴뚝이 올라와 있다. 혐오에 선동당한 피해자가 이를 재생산하는 가해자가 된 모습을 표현했다. 권 작가는 “20세기 독일 작가 존 하트필드가 나치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포스터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오늘날의 혐오가 100년 전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었다”고 했다. 반면 진기종 작가의 ‘우리와 그들’은 기도하는 손에 들린 가톨릭과 불교, 이슬람교의 묵주, 염주를 각각 표현한 작품이다. 세 종교의 교리는 다르지만 인간과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1층 전시장에서 2층으로 올라가면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 케테 콜비츠(1867~1945)의 ‘아가, 봄이 왔다’가 개관전으로 함께 열리고 있다. 콜비츠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들을,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손자를 잃은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전시 제목은 아들을 떠올리며 콜비츠가 한 독백에서 따왔다.

전시장 중앙에 보이는 청동 조각은 그의 대표작 ‘여인과 두 아이’다. 어머니가 양팔과 다리로 온 힘을 다해 아이들을 감싸고 있고, 아이들은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통해 모성애를 표현했다. 전쟁의 참상과 비극적인 죽음, 가족 간 이별의 슬픔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판화 원작 32점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인터랙티브 설치를 비롯해 알기 쉽고 재미있는 작품이 모여 있어 제주도를 방문한 가족이나 연인들이 관람할 만하다.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더욱 상세한 설명도 제공된다. 관람료는 성인 5000원, 청소년과 군인은 3000원인데 이달 말까지는 무료다. 전시는 내년 3월 말까지.

제주=성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