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을 쿠팡의 총수로 지정하냐 마냐의 문제는 의외로 폭발력이 큰 사안이다. 공정거래위원회라는 한국의 정부 조직이 미국 상장 기업의 경영진과 이사회 멤버들을 감시 대상으로 지목하는 것이어서다.
규제의 실효성도 문제지만,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후폭풍이 예상된다. 비록 가정이긴 하지만, 중대재해법상 김범석 의장이 처벌 대상으로 지정돼 쿠팡 주가가 떨어질 경우 총수 지정제 등 한국만의 독특한 기업 규제들이 글로벌 투자 시장의 ‘핫 이슈’로 부상할 지도 모른다. 제재 실효성 두고 고심하는 공정위29일 최종 발표를 앞두고 공정위는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경제신문이 입수한 자료(송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질의에 대한 공정위 답변)에 따르면 공정위는 ‘김범석 총수’ 지정에 관해 크게 세 가지 기준에 근거해 최종 결정을 준비 중이다. “외국인에 대한 규제집행 가능성, 제재 실효성, 타 기업집단과의 형평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검토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국내외 법률 지식으로 중무장한 공정위가 가장 고심하고 있는 부분은 외국인, 다시 말해 미국 기업에 대해 규제를 집행할 수 있느냐다. 공정위의 딜레마는 국내 재계에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쿠팡만의 독특한 기업 구조에서 기인한다. ‘쿠팡 그룹’은 미국 델러웨어에 있는 쿠팡Inc가 일종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그 아래에 쿠팡 한국법인을 비롯해 쿠팡USA, 쿠팡 베이징, 쿠팡 상하이, 쿠팡 선전, 쿠팡 싱가포르 등 6개 해외 자회사가 연결돼 있다. 이들 자회사에 대한 쿠팡Inc의 지분율은 모두 100%다.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이 창업을 한 곳은 엄밀히 말해 미국과 한국 두 곳에서다. 2010년 미국 델러웨어에 유한책임회사 쿠팡(현 쿠팡Inc)을 설립하고, 서울 송파구에 쿠팡 한국법인을 세웠다. 두 행위는 시차가 무의미할 만큼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김 의장의 의도는 간명했다. ‘e커머스의 미래’라는 자신의 꿈을 펼칠 장소로 한국을 택했고, 꿈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 다시 말해 자금 조달처로는 미국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2010년에 ‘한국 비즈니스’만으로 미 증시 상장까지 가는 일은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쿠팡이 미국에 일종의 지주회사격 법인을 세운 건 크게 인력 수급과 자본 조달,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창업 초기에 쿠팡은 전도는 유망했으나, 미생(未生)의 스타트업에 불과했다. 글로벌 벤처캐피탈(VC) 업계의 큰손들로부터 투자를 받으려면 ‘코리아 리스크’부터 없애야했다. 글로벌 VC 업계 관계자는 “한국 스타트업이 미국 등에서 투자를 받으려면 조건도 까다로운 데다 더욱 중요하게는 투자 상한선이 정해져 있다”고 말했다.
빅데이터, 인공지능(AI) 등 첨담 IT에 기반한 e커머스 모델을 만들려는 김 의장의 구상 속에서 핵심은 인재였다. 문제는 이마트, 롯데백화점 등 오프라인 유통업체가 지배하는 2010년 당시의 한국에서 그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구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데이터 분석에 기초한 쿠팡의 기술적 기반은 2014년 실리콘밸리에 있는 캄씨(Calm Sea)라는 빅데이터 쇼핑 업체를 인수한 것에서부터 축적됐다.
쿠팡이 미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하고, 한 때 시가총액이 100조원에 육박할 정도로 투자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은 쿠팡이라는 회사가 미국에 있기 때문이다. 쿠팡Inc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FBI 등 기업인들의 사익 편취 및 계열사 간 부당거래 등을 감시하는 각종 정부 기관의 감시를 받는다. 투자자들은 미국 주식회사로 스스로를 공개한 쿠팡의 정보와 공시들을 신뢰하며, 이에 근거해 쿠팡 주식을 사고 판다. 의외로 판 커질 수 있는 '쿠팡 총수' 문제공정위가 쿠팡 한국법인을 대기업집단에 지정하는 것을 넘어 김범석 의장을 총수로 지정할 경우 이는 ‘이론상’ 공정위가 규제 그물망을 미국에 있는 쿠팡Inc로 펼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쿠팡 그룹’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자가 김 의장이라고 결론내린다면 쿠팡Inc는 물론이고, 해외 자회사들의 경영진과 이사회 임원들도 공정위에 신고 의무가 있다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쿠팡Inc 이사회의 핵심 멤버인 닐 메타(비상임이사)와 그의 회사도 각종 거래 내역을 공정위에 신고해야한다. 닐 메타는 그린옥스캐피탈이라는 미 벤처캐피탈사의 창업자다. 구글 프로덕트 매니저 출신으로, 김 의장과는 하버드대 동문이다. 실리콘밸리에선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선망하는 인물이자, 막강한 자본력을 갖고 있는 ‘큰손’이다.
김범석 의장의 특수관계인을 어떻게 정할 지도 공정위로선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공정위는 총수를 지정하면서 총수의 친족(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 배우자)도 사익 편취 등의 감시 대상으로 지정한다. 문제는 미국 국적인 김 의장의 경우 누가 친족인 지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 CFR(Code of Federal Regulation)는 친족이 아닌 가족 개념을 적용한다. 서구권엔 동양 사회에 친숙한 친족 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김 의장이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느냐 여부도 논란 거리다. 이와 관련해 공정위는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지배주주의 지분율, 경영활동 및 임원선임 등에 대한 지배주주의 영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동일인을 판단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일각에선 김 의장이 차등의결권을 적용받아 쿠팡Inc 이사회에서 의결권 지분(76.7%)이 가장 높다는 점을 들어 김 의장이 실질적인 지배자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에 대해 IT 및 스타트업 업계에선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창업자인 김 의장에게 차등의결권을 제공한 것은 그에게 ‘그룹’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창업자로서 그만이 갖고 있는 ‘비전’이 쿠팡의 주가, 더 나아가 쿠팡의 미래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 증시에 상장한 클래스A 주식을 기준으로 최대 주주는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비전펀드다. 김 의장이 작년 하반기에 영입한 우버 CTO(최고기술책임자) 출신을 영입한 것도 손정의 회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버는 소프트뱅크비전펀드의 투자 기업 중 하나다.
쿠팡은 지난 3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신고서를 제출하면서 한국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규제 리스크를 언급했다. 개연성 있는 모든 위험 요소를 언급함으로써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신고서에서 쿠팡은 공정위의 대기업집단 지정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자산 규모가 5조원 이상을 넘어서면 자동적으로 지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수 지정’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쿠팡의 법률적 지식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가정했다는 얘기다.
공정위가 검은 머리 외국인에 대한 특혜라는 ‘정서법’에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게 법조계의 분석이다. 실효성이 없는 규제를 강행할 경우 득보다 실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05년 강철규 위원장 시절, 론스타를 대기업집단에 지정하는 문제를 두고 공정위가 고심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공정위의 이번 한수가 자칫 의외의 나비 효과로 번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정위로선 이래저래 딜레마다.
박동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