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구루마다니 노부아키 도시바 사장(사진)이 갑자기 사임했다. 영국계 사모펀드(PEF) 운용사 CVC캐피털로부터 2조3000억엔(약 23조6348억원) 규모의 인수제안을 받은 지 8일 만이다.
배의 운명을 좌우할 항로결정을 앞두고 선장이 배에서 내리는 이례적인 사태, 그 기원은 2015년 도시바의 대규모 회계부정 사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바가 2008~2014년 7년간 2200억엔의 이익을 부풀린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현직 사장 3명이 한꺼번에 사임했다. 상장폐지 막은 증자가 '분란의 씨앗'일찌감치 이사회 중심의 경영체제를 도입해 '지배구조의 우등생'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이 또한 허구였음이 밝혀졌다.
이듬해 미국의 원자력발전 자회사 웨스팅하우스에서 발생한 대규모 손실은 도시바의 지배구조 뿐 아니라 재무구조까지 무너뜨렸다. 도시바가 2006년 인수한 웨스팅하우스는 가전 중심의 사업구조를 발전·인프라로 전환하기 위해 54억달러(약 6조2000억원)를 쏟아부은 승부수였다.
웨스팅하우스로부터 7000억엔 이상의 손실을 떠안아 자본잠식에 빠진 도시바는 2017년 12월 6000억엔 규모의 증자를 실시했다. 2년 연속 자본잠식으로 인한 주식의 상장폐지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60여곳에 달하는 해외 행동주의 펀드가 증자에 참여해 주주가 됐다. 결과적으로 상장폐지를 면하는 대신 분란의 씨앗을 심은 셈이 됐다.
행동주의 펀드들은 도시바의 보유자금을 놓고 사사건건 경영진과 맞붙었다. 도시바는 인프라 기업을 인수·합병(M&A)하는데 1조엔 이상을 투입해 성장동력을 확보하려 했다. 행동주의 펀드들은 그 돈으로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늘리라고 요구했다.
2017년 증자에 참여한 행동주의 펀드가 보유한 지분율은 지금도 25% 이상이다. 도시바의 1~2대 주주인 홍콩계 에피시모캐피털매니지먼트(보유지분 9.9%)와 3D인베스트먼트(7.2%) 모두 매년 주주총회에서 경영진과 각을 세우는 행동주의 펀드다.
일부에서 CVC의 인수제안을 반긴 것은 펀드 주주와의 오랜 대립이 회사 경쟁력을 갉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 6일 CVC는 주당 5000엔에 도시바 지분 100%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당일 종가 3830엔에 30%의 경영권 프리미엄을 더한 가격이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CVC 일본법인 회장이었던 구루마다니 사장이 친정을 '개인 백기사'로 끌어들여 장기집권을 시도하려는 것이라는 불만이 들끓었다. 2019년 99%에 달했던 구루마다니 사장의 연임 지지율은 작년 7월 주주총회에서 57%로 곤두박질쳤다. 올 여름 주총에서는 연임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일본 언론들은 구루마다니 사장이 도시바 내부의 반발로 사실상 해임됐다고 전했다.
구루마다니 사장의 낙마에도 불구하고 CVC는 예정대로 공개매수를 공식 제안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공개매수를 제안받은 회사의 경영진은 찬반 입장을 밝혀야 한다. 요미우리신문은 16일 도시바의 신임 경영진이 CVC의 제안을 거부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제안을 거부하려면 경영진은 CVC가 제시한 가격 이상으로 회사가치를 높이는 방안을 주주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합리적인 반대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주주로부터 소송을 당할 우려도 크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했다. 글로벌 PE 집결 '日 대표기업 인수 기회'일본 대표 기업을 인수할 기회가 생기자 벌써부터 군침을 흘리는 글로벌 PE들이 적지 않다. 파이낸셜타임스와 블룸버그 등은 세계 4대 PE 가운데 하나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를 비롯해 미국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 캐나다 인프라 전문 펀드 브룩필드 등이 CVC보다 높은 가격에 인수를 제안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에너지와 인프라, 엘리베이터 등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는 사업부 매출이 전체의 56%를 차지하는 도시바는 PE들이 선호하는 매물이다.
구루마다니 사장 재직기간 동안 의료기기 사업부와 백색가전 사업부, 메모리반도체 사업부(현 기옥시아) 등을 매각하고, 7000명을 정리해고하는 등 사업재편도 마무리 단계다. 덕분에 2020회계연도 영업이익이 1100억엔으로 3년 전보다 3배 이상 늘어날 전망이다.
성장 가능성도 밝다. 도시바는 양자컴퓨터 시대의 필수기술인 양자암호 관련 특허(104건)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PE들의 기대치를 높이는 부분은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기옥시아 지분 41%를 보유한 점이다. 미중 마찰의 여파로 지난해 상장(IPO)을 연기했을 때 기옥시아의 기업가치는 1조5000억엔이었다. 코로나19 이후 반도체 부족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기업가치가 2조6000억엔까지 치솟았다는 분석이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반도체 업체인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웨스턴디지털이 300억달러(약 3조3000억엔)에 기옥시아 인수를 타진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이 경우 도시바가 보유한 기옥시아의 지분 가치는 1조3000억엔, 도시바 전체의 기업가치는 2조8000억엔으로 뛰어오른다. 도시바 시가총액(1조7400억엔)보다 1조엔 이상 많다.
도시바의 주주인 홍콩 행동주의펀드 오아시스매니지먼트도 CVC의 주당 인수가격이 최소 6200엔 이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대주주인 3D인베스트먼트는 작년 총회에서 도시바의 적정주가를 6500엔 이상, 시총을 3조엔으로 평가했다.
인수가격이 높아질 수록 경영진이 매각에 반대할 여지가 좁아진다. 146년 전통의 일본 대표기업이 M&A로 부흥을 꾀했다가 M&A로 회사 전체를 넘기게 된 상황에 놓인 셈이다. 글로벌 PE에게 인수의 길을 열어준 구루마다니 사장은 2018년 도시바가 위기에서 구원해달라며 53년 만에 외부에서 구해온 경영자였다.
변수는 일본 정부의 승인이다. 경제안보에 직결되는 원자력발전 사업이 주력인 도시바를 해외자본이 인수하려면 경제산업성과 재무성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CVC와 KKR은 모두 일본정책투자은행(DBJ)과 정부 산하 펀드인 산업혁신투자기구(JIC)에 공동인수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정책자금을 주주로 끌어들이면 정부의 승인을 받기도 쉽고, 도시바 임직원들의 거부감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CVC는 미국 PEF 베인캐피털과 컨소시엄을 구성할 것으로 전해진다. 베인캐피털은 2018년 SK하이닉스 등과 공동으로 기옥시아를 인수한 PE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