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내수 경기가 직격탄을 맞았지만 명품·슈퍼카 등 고가 제품 소비는 오히려 불티 나게 팔렸다. 1억원 이상 고가 수입차 판매가 지난해 50% 넘게 치솟았고, 한 개에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명품을 사기 위해 백화점 문을 열기 전부터 줄이 늘어서는 진풍경도 수차례 연출됐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출이 뜸해지고 해외 여행길이 막히자 소비자들이 명품과 수입차, 하이엔드 가전제품 등 고가 제품 구매에 지갑을 열어 보상감을 얻는 '보복 소비'가 나타난 것. '코로나 불황 속 럭셔리 호황'인 셈이다. 가격 더 올려도 샀다…1조 매출 돌파한 루이비통
이같은 보복소비 흐름이 가장 두드러진 곳은 명품업계다. 15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이른바 '3대 명품'으로 불리는 '에·루·샤(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는 지난해 한국에서 합산 2조4000억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
세계 최대 명품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소속 브랜드 루이비통의 국내 법인 루이비통코리아 매출은 지난해 1조원을 돌파했다. 2020년 매출이 전년 대비 33.4% 늘어난 1조468억원으로 종전 마지막으로 국내에 감사보고서를 공개한 2011년(4973억원) 이후 9년 만에 두 배 넘게 뛰었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176.7% 증가한 1519억원, 당기순이익도 284.7% 급증한 703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광고선전비 지출을 절반(52.7% 감소)으로 줄였지만 실적은 오히려 고성장세를 이어갔다.
앞서 지난 9일 처음으로 실적을 공개한 에르메스코리아의 경우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15.8% 증가한 4191억원으로 집계됐다. 영업익과 순이익은 각각 15.9%, 15.8% 늘어난 1334억원, 986억원이었다.
마찬가지로 처음 실적을 공개한 샤넬은 면세점 업계 타격에도 불구하고 9000억원이 넘는 매출을 거뒀다. 통상 명품 브랜드들은 별도의 협력사를 통해 면세사업부를 운영, 실적이 별도로 집계되는 경향이 있지만 샤넬은 면세사업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13% 감소한 9296억원을 거뒀다.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각각 34%, 32% 증가한 1491억원, 1069억원이었다.
이는 위축됐던 소비심리가 폭발하면서 명품 구매로 이어진 '보복 소비'와 부의 과시를 위해 가격이 올라도 수요가 줄지 않는 '베블런 효과' 등이 요인으로 꼽힌다. 주요 소비층으로 떠오른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명품을 개성 표출 수단으로 여기는 '플렉스' 문화도 일조했다.
이지영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해외여행이 장기간 어려워지면서 국내 소비자들의 백화점 수입 상품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 백화점 내 카테고리별 성장률을 보면 해외 유명브랜드는 지난해 하반기에서 올해 상반기까지 30~50%에 이르는 고성장 중"이라고 분석했다. "오빠 차 뽑았다"…초고가 수입차 77% 뛰었다
자동차 시장에서도 고가 수입차를 찾는 소비자들 발길이 몰려 신기록을 세웠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수입차 판매량은 27만4859대로 역대 최다 판매를 기록했다.
특히 초고가 수입차 판매량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지난해 1억5000만원 이상 초고가 수입차 판매량은 1만817대로 77% 폭증했다. 1억~1억5000만원 가격의 수입차도 3만2341대로 판매대수가 54% 늘었다.
올해도 수입차 시장의 호황은 계속되고 있다. 올 1분기 수입차 누적 등록대수는 7만1908대로 전년 동기 대비 31.5% 늘었다. 벤틀리 55대, 롤스로이스 53대, 람보르기니 81대 등이 판매됐다.
세계적으로도 슈퍼카들이 줄줄이 신기록을 썼다. 롤스로이스는 올해 1분기 전 세계에서 1380대를 판매, 1분기 기준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 판매 증가율이 62%에 달했다. 람보르기니는 지난해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팬데믹) 상황에도 불구하고 총 7430대를 팔아 역대 2위 판매 기록을 세웠다. 이중 국내 시장에서는 303대가 팔렸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 장기화 속에서도 지난해 개별소비세 인하 효과와 인기 브랜드의 신차 출시로 고가 수입차 수요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집콕엔 '대형TV'…맞춤형가전 찾아 지갑 열었다
가전 분야 역시 코로나19 사태 속 고가의 플래그십 모델이나 맞춤형 제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집콕 문화'가 확산하면서 프리미엄급 가전과 TV 판매가 늘어났다.
가전에 강점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LG전자는 올 1분기 분기 사상 최대 매출과 영업이익을 다시 썼다. 코로나19 속 공기청정기, 의류관리기 등 신(新)가전 인기에 더해 맞춤형 공간 인테리어 가전 '오브제컬렉션'이 흥행한 결과다. 1분기 매출과 영업익은 전년 동기 대비 28%, 39% 증가한 18조8057억원, 1조5178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특히 TV 사업을 담당하는 홈엔터테인먼트(HE) 부문은 프리미엄급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TV가 지난해에 이어 올 초에도 판매량이 늘어나면서 예상치를 웃돈 것으로 추정된다. OLED TV 물량은 80만대 수준, LCD TV는 지난해 1분기 대비 큰폭 증가한 780만대 내외가 팔렸다는 분석이다.
IT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집이라는 공간의 역할이 학교, 헬스장, 사무실의 기능을 흡수했다"면서 "집을 다양하게 꾸미기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경향이 코로나 시국에서 나타났다. 오브제는 단순히 가전 역할에 머물지 않고 인테리어 소재를 내세운 게 효과를 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인한 보상심리가 강화된 상황에서 보다 개인의 가치관에 초점을 맞춘 고가 소비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연승 한국유통학회장(단국대 교수)은 "코로나 장기화로 재택근무와 '집콕'이 확산하면서 본인에게 자기에 투자하는 '포미족' 소비 현상이 강화되고 있다"며 "만족을 주는 제품에는 아낌 없이 지갑을 여는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 소비가 중요해진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최재섭 남서울대 교수도 "소비자가 유지하던 일정한 소비 패턴이 코로나19로 인해 막히면서 고가 제품을 소비하려는 '보상소비' 흐름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며 "자산 가치 상승으로 인해 소득양극화가 심화된 상황에서 연장된 소비양극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오정민/강경주/신현아 한경닷컴 기자 bloom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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