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07일(16:37)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1인 1 주식계좌 시대라지만, 한 명이 여러 개의 계좌를 보유한 중복계좌를 제외하면 우리 나라의 개인 투자자 수는 910만여명(지난해 말 기준)이다. 동학개미 열풍으로 작년 한해 동안만 300만명이나 늘어났지만, 여전히 5200만 국민 중 80% 이상은 주식 계좌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식 계좌를 갖고 있다고 모두 자신을 동학개미라고 생각하지도 않겠지만, 백 번 양보해 그렇다 치더라도 동학개미의 이익이 전체 국민의 이익과 일치하는 건 아닌 게 분명하다.
지난해 말 기준 국민연금 가입자는 2210만여명이다. 60세가 넘어 수급자가 된 540만여명을 포함하면 국민연금이 잘 되어야 노후가 편안한 사람은 2750만여명. 곧 18세를 넘어 가입자가 될 미성년자들까지 고려하면 ‘국민연금의 이익은 곧 국민의 이익’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착각을 해도 야무지게 하는 일부 개미들이 있다. 국민연금이 목표 비중에 맞추기 위해 국내 주식을 매도하자 “모처럼 박스피를 탈출한 주식시장에 찬물을 끼얹는 건 동학개미에 대한 배신”이라며 들고 일어났다. 국민연금공단이 있는 전북 전주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기금운용본부 해체’ 청원까지 올렸다.
국민연금이 주식을 파는 건 전체 포트폴리오에서 국내 주식의 비중이 목표치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주가가 많이 오른 게 주요 이유다. 반대로 만약 주가가 많이 빠져 국내 주식 비중이 낮아지면 국민연금은 주식을 사들일 것이다. 목표 비중은 이렇게 쌀 때 사고 비쌀 때 파는 투자의 원칙을 지키게 해준다.
목표 비중이 중요한 더 큰 이유는 포트폴리오 다변화다.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자산군에 골고루 투자해야 위험 대비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 그래서 연기금들은 전략적 자산배분(SAA)을 통해 어느 지역, 어느 자산군에 전체의 몇 %를 투자할 지 미리 정한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과 채권에 과도하게 투자금이 몰려 있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SAA를 통해 꾸준히 해외 비중을 늘려가고 있다. 국민들의 노후 자금을 안정적으로 굴려야 하는 집사로서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주식 시장으로서도 국민연금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불안 요인이다. 향후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는 사람보다 수급자가 많아져 자산을 팔아야 할 때가 됐을 때 주식 시장의 대혼란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일 것이다.
이런데도 원칙을 깨자는 사람들이 전주와 청와대로 몰려간 일부 개미 투자자들이다. 동학개미들이 주식을 산 덕분에 국민연금도 돈을 벌었으니 팔지 말고 주가를 떠받치라는 주장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민 전체가 손해를 봐도 좋다는 집단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다.
수급은 단기적으로 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주가를 결정하는 건 기업 펀더멘탈이다. 이를 믿고 투자하는 건전한 장기 투자자라면 국민연금이 주식을 판다고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국민연금이 없어도 기업들의 경쟁력이 높아지면 우리 증시로 유입될 자본은 전세계에 널려있다.
문제는 자신들이 개인투자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착각하는 일부 개미들의 목소리에 놀라 원칙을 깨려는 정부와 여당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26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주식 목표 비중의 허용 한도를 넓히는 방안을 논의했다. 현재는 목표비중 16.8%의 ±2% 범위 내에서 주식 보유가 허용되기 때문에 18.8%까지 국내 주식을 보유할 수 있는데, 이를 20.3%까지 높이자는 것이다. 당연직 기금운용위원이지만 보통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기획재정부 차관까지 이례적으로 참석해 찬성표를 유도했다. 다행히 반대 의견이 많아 결론을 내지 못했는데, 오는 9일 다시 이 안건만 다루는 ‘원포인트 기금위’를 연다는 소식이다.
국민의 노후 자금을 일부 목소리 큰 개미들의 민원 해결에 결국 동원한다면, 정치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국민연금의 후진적 지배구조가 다시 한번 도마 위에 오를 것이다.
유창재 한경글로벌뉴스네트워크 편집장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