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물이나 컴퓨터 화면으로만 가국현(63)의 ‘감성정물’을 보면 진부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그저 부잣집 거실에 걸려 있음 직한 꽃과 그릇 정물화여서다. 작품의 진가는 실물로 봤을 때 드러난다. 다양한 색채를 여러 번 겹쳐 만들어낸 발색이 다층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예컨대 작가가 표현한 보라색의 표면은 청색이지만, 자세히 보면 속에 노란색과 빨간색 계열의 색채가 깔려 있어 오묘하다. 작품 표면에는 한지와 토기 등 소재 고유의 질감이 살아있다.
가국현의 ‘감성전’이 서울 압구정로 청작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 중인 24점의 작품 제목은 모두 ‘감성정물’이다. 꽃이나 과일을 담고 있는 그릇을 작가 특유의 색채와 형태로 그려냈다.
“직접 실물을 갖다 놓지 않고 제 머릿속에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실제 정물의 모습이 아니라 저의 감각으로 느끼고 해석한 정물을 표현한 거죠. 그래서 감성이라는 단어를 붙였어요.”
그림은 그릇을 전면에 내세운다. 용기가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내용물은 그 위에 얹혀 있는 모양새다. 꽃과 과일이 도드라지는 일반적인 정물과 대조적이다. 꽃병부터 막사발, 질박한 토기, 새우젓을 담아 팔던 도자기, 일반 가정의 밥그릇 등 다양한 그릇의 질감을 생생하게 표현해냈다. 그렇다고 꽃이 들러리만 선 건 아니다. 강렬한 선과 색채로 원초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감성정물은 구상화로 분류되지만 추상화의 성격도 갖고 있다. 그의 작품 중 푸른 화병에 든 안개꽃은 가까이서 보면 자글자글한 흰 물방울들이 모여 있는 듯하다. 작가가 물감을 연구한 끝에 직접 개발한 ‘수포 기법’을 사용했다.
“화면에 바른 물감을 나이프로 긁어보기도 하고 찍어도 보고 천을 붙여보기도 하는 등 물감의 모든 성질을 시험해보고 있었습니다. 수포 기법을 발견하고는 이거다 싶었지요.”
배경은 한지와 비슷한 느낌을 낸다. 원하는 질감이 나올 때까지 물감을 수없이 덧칠했다는 설명이다. 유채물감이 마르는 시간 때문에 100호 크기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두 달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전시의 백미는 달항아리에 꽃을 담은 작품이다. 항아리는 사진으로 보면 창백한 흰색이지만 실제로는 노랗다. 검은 배경은 밤하늘을 연상시킨다. 표면의 질감은 달의 울퉁불퉁한 크레이터 그 자체다.
가국현은 2011년 미국 마이애미 레드닷 아트페어에 출품한 8점이 ‘완판’된 뒤 국내외 컬렉터들에게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특히 기업인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항아리 그림이 복과 재물을 불러온다는 통념 때문만은 아니다. 손성례 청작화랑 대표는 “작품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동시에 얻어간다는 평가가 많았다”고 말했다.
가국현은 원래 꽃 그림보다는 도자기 그림을 즐겨 그렸다. 자연물보다는 인공물이 작가가 추구하는 미의식을 담기 좋아서다. 하지만 이번에는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작품에서 꽃 비중을 늘렸다. 덕분에 작품에서 밝고 푸근하며 따뜻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전시는 오는 20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