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돈을 빌리면 빌린 사람의 문제지만, 큰 돈을 빌려주면 빌려준 사람의 문제가 된다.”
큰 돈일수록 돈을 되돌려 받지 못하면 빌려준 사람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오기 때문에, 빌려준 후에 노심초사하게 마련인 상황을 잘 설명해준 말입니다. 실제로 대출을 기반으로 하는 은행이나 여신전문 금융기관들은 체납을 예측·방지하고 회수하는 업무에 상당한 자원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모펀드(PEF)도 매우 유사한 상황입니다.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사업모델을 가진 PEF가 왜 유사한 상황이라는 것인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PEF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상황이 이렇게 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PEF는 자본이라는 것이 귀했던 시기에 대규모 모험 자본을 시장에 투여해주는 역할을 하면서 급격히 성장해 왔습니다. 몇 차례 금융·실물 위기를 거치면서 그 규모를 키워갔고, 그럴수록 PEF의 성과도 개선되면서 시장내 입지도 이른바 '전주(錢主)' 혹은 '갑'이 됐습니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부와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을 통한 위기 대처가 전세계적으로 일상화되고 반복되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유동성이 확대되고 금리가 낮아지는 상황이 고착화되기 시작한 것이죠. “돈이 제일 싸다”는 말은 그때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율을 기대할 수 있는 PEF들에는 더 큰 자금이 몰렸고, PEF들이 운용하는 펀드의 규모도 급격히 커져갔습니다. 문제는 투자를 받는 기업들 입장에서 더 이상 PEF가 '구세주' 혹은 '단비'의 역할을 해주지 못하게 됐다는 점입니다.
일단 대출 자체가 부담이 없어졌고, PEF 간에도 경쟁이 심해지면서 '골라서' 그리고 '좋은 조건'에 PEF 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환경이 됐습니다. 거기에 벤처캐피털(VC), 금융기관의 고유계정투자, 패밀리오피스 등도 규모를 키우면서 기존 PEF의 투자 영역으로 진입해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빠르게 성장하거나 높은 수익성을 가진 기업들에 대한 인기가 치솟고, 주식시장에 상장되어 있는 관련기업들의 밸류에이션 멀티플이 높아진 것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PEF들은 물론 시중의 다양한 자본투자자들이 매력적인 기업들에게 자본 유치를 설득해야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투자를 할 수 있는 기간과 만기가 존재하는 특성상, PEF는 더 이상 '갑(甲)'의 입지가 아닌 자본을 팔아야 하는 '을(乙)'의 입장이 된 것입니다. 투자 대상 기업들의 주주들을 만나 왜 우리 PEF에서 투자를 받아야 하는지, 투자를 하게 되면 기업 가치 증대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 설득하는 일이 가장 중요해졌습니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PEF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밸류에이션과 조건에 투자를 하기 점점 어려워졌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설득이 잘 되어 투자를 집행하더라도, 목표하는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모니터링하고 관여하는 일이 PEF의 주업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큰 돈을 빌려준 사람'과 유사한 입장이 된 것이죠. 그러다 타 주주와의 갈등이라도 발생하는 경우, 어떻게든 투자 수익을 내야 하는 PEF는 약자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최근 대기업에 투자한 몇 건의 소수지분 투자건과 관련된 소송에 PEF 업계가 주목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경영권 지분을 인수한 경우에도 PEF는 항상 노심초사하게 돼있습니다. PEF는 선임된 경영진들이 최선을 다해 기업 가치를 증대시키는데 집중할 수 있도록 급여와 보너스와 투자 회수(Exit) 인센티브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끝이 아닙니다. 최선의 경영진을 선임했는지, 경영진 사이에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지 등을 항상 체크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거기에 지난해에는 코로나19라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변수까지 등장했습니다. PEF 운용역들이 매일 '잠 못 드는 밤'을 경험한다는 말이 우스개만은 아닌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PEF는 더 이상 '갑'이 아닙니다. 아니 2005년에 시작된 대한민국 PEF들은, 아예 처음부터 '을'이었던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