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인천의 한 유원지를 찾은 한국화가 유근택(56)를 반긴 것은 무성한 잡초였다. 코로나19로 사람이 떠난 자리는 보도블럭을 뚫고 거칠게 솟아오른 잡초가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이 돌보지 않는 틈에 보도블럭과 시멘트 사이를 뚫고 허리춤까지 자란 잡초를 보니 '살아있음의 수고로움'이 느껴졌습니다.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시기에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수고로움에 우리 청춘들, 중년, 인간사가 겹쳐보였죠."
이렇게 탄생한 것이 '생.장' 연작이다. '청춘'에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자신의 키만큼 자란 잡초더미에서 마스크를 쓴 채 손을 잡고 있다. 사회에 내딛는 한발 한발이 힘든 상황에서 코로나19로 악재까지 맞닥뜨린 청춘들이 겪는 성장통에 대한 연민을 담았다. '나'는 이제 50대 중반에 접어든 작가 자신을 담았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의지와 이제는 쉬고싶은 마음이 엇갈리는 자신을 서 있는 남자와 그로기 상태로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나란히 뉘어 표현했다.
서울 진관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유근택 성신여대 교수의 개인전 '시간의 피부'는 팬데믹이 드러낸 인간의 무기력함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회화 56점에는 그사이 작가가 맞닥뜨린 정치 사회적 격변이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담겨있다.
누구에게나 그랬겠지만 유근택에게 코로나19는 더욱 강렬했다. 지난해 봄 한국이 코로나19에 잠식되기 시작하던 때에 프랑스 노르망디의 레지던시로 건너갔다. 운좋게 감염병을 피했다고 생각하기 무색하게 유럽 전역에 코로나19가 대유행하면서 '셧다운'에 들어갔다. 생애 처음,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불안감이 엄습했다. 무언가 집중할 대상이 필요했던 그때 떠올린 것이 불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때 유품을 태운 뒤 남은 재를 보며 조형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가져간 신문을 태우고 남은 재를 통해 그때의 조형적 이미지를 다시 한번 떠올렸지요."
'시간' 연작은 코로나19로 터져나온 사상 초유의 사태를 기록한 신문이 타들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신천지발 대구 집단감염, 유럽 봉쇄 등의 뉴스가 재와 함께 그의 그림에 남았다. 총 7점의 작품은 시계방향으로 점차 타들어가는 신문을 보여주며 시간이 가진 절대적 운명성과 극적인 연속성을 드러낸다.
철책을 배경으로 만찬장의 한 장면을 담은 '오랜 기다림' 연작 남북정상회담에서 열렸던 만찬장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주인공들이 떠나고 홀로남은 식기와 테이블에서는 당장이라도 남북관계가 해결될 것 같던 설렘, 하지만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좌절까지 롤러코스터를 타던 남북관계가 남긴 쓸쓸함이 배어난다.
이번 전시는 2017년 현대갤러리 전시 이후 4년만에 갖는 개인전이다. 한지와 수묵으로 물성을 탐구하던 그의 작업은 한층 더 깊고 다채로워졌다. 이번 전시에서는 수묵 대신 채색을 선택했다. 6겹으로 배접한 한지 위에 전통 채색화 안료인 호분과 서양화 물감인 구아슈를 섞어 발랐다. 물감이 빨아들이는 한지덕에 그의 작품은 담백하며내서도 묵직한 힘을 뿝는다.
이 위를 철로 된 솔로 긋기와 드로잉을 반복한다. 그의 손길을 거치며 종이의 섬유질은 생명을 얻고 기세를 뿜어낸다. 힘찬 터치와 거친 마티에르는 팬데믹으로 무기력함에 빠진 우리 내면의 우울함을 드라마틱하게 전달한다. 유근택은 "공간과 내가 만나는 순간을 회화적으로 풀어내는데 있어 표현의 폭이 더 넓히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5월 23일까지.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