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3월29일(03:00)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산업은행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면서 지난 26일 주주총회에서 경영권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도 무난히 통과됐다. 그러나 상속세 문제 등으로 인해 조 회장 일가의 지위가 불안정하다는 평가가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한진칼 자체가 다시 수년 후에 매물로 나올 가능성도 거론된다.
◆상속세 마련 분주한 한진家
3자연합과의 싸움에서 일단 승리한 지금, 조 회장 일가의 가장 골칫거리는 상속세다. 이미 주식담보대출 등이 적지 않게 걸린 상황에서 추가 담보대출을 받을 여지도 많지 않은데 개인이 수백억원 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족 간에 상속세 재원마련 문제를 두고 다툼을 벌이면서 감정의 골이 더 깊어졌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조 회장 일가 4명이 내야 하는 상속세는 약 2700억원이다. 특히 세 자녀는 각 600억원 가량을 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년에 걸쳐서 분할 납부하면 한 해에 120억원 꼴이다. 상속세 마련을 위해 조 회장은 지난해 주식담보대출로 현금 400억원을 만들었다.
조 회장의 어머니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 동생 조현민 (주)한진 부사장도 지난 26일 그룹 계열사 정석기업 지분을 매각했다. 이 고문과 조 부사장은 전량(6.87%, 4.59%), 조 회장은 일부(3.83% 중 0.76%)를 팔아서 각각 270억, 180억, 30억원을 손에 쥐었다. 정석기업은 한진그룹 부동산 관리, 주차장 운영 등 담당하는 회사로 한진칼(48.27%)과 조 회장 일가가 지분을 나눠 가지고 있다. 조양호 회장이 2019년 4월 미국에서 갑작스레 사망한 뒤 조 회장이 갖고 있던 정석기업 지분(20.64%)은 한진칼 지분(17.84%)과 함께 세 자녀와 이 고문에게 상속됐다.
이달 초 조 회장의 누나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한진칼 주식 5만5000주를 KCGI에 넘겨 33억원 가량의 현금을 마련했다. 세간에서는 3자연합에서 조 전 부사장이 빠진다는 식으로 보도되기도 했지만 상속세 납부를 위한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오히려 3자연합이 '지금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KCGI가 조 전 부사장의 지분을 받아준 것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조 전 부사장이 33억원어치 주식을 KCGI에 팔았다는 것은, 그가 다른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모자란 부분이 33억원어치였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 시장에서는 조 전 부사장이 무담보 신용대출로 자금을 구한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상속세 나비효과..3자연합은 깨질 듯
상속세 문제 때문에라도 3자연합은 깨질 수 밖에 없을 전망이다. 조 전 부사장이 올해 120억원을 마련하기 어려웠다면, 내년 이후에는 더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가 보유한 지분(보통주 5.79%)이 3자연합 측 지분(41.84%)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적지 않다. 조 전 부사장이 빠지고 나면 3자연합의 지분율 하락과 동시에 위상도 한 단계 내려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3자연합이 유명무실해진다고 해서 조 회장 측의 경영권이 '더' 공고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 회장 측에서도 주식담보대출을 받은 지분이 늘어나면 그만큼 '만약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카드가 줄어들게 된다. 특히 주가가 급락하는 국면이 발생할 경우 담보대출을 받은 주식은 대단히 취약하다. 일정 수준 이하로 주가가 떨어지면 추가 담보를 요구받거나 주식이 매도될 수 있어서다.
게다가 KCGI와 반도건설은 당장 지분을 팔고 나갈 생각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약 17% 지분을 보유한 KCGI가 조용히 지분 매각을 타진한다는 이야기가 적지 않게 들려오지만, 현 상황에서 KCGI 지분을 한꺼번에 매입할 주체가 쉽게 나타날 가능성은 적다. 게다가 KCGI의 지분이라는 것은 여러 개의 SPC에 나뉘어 있고 각각 다른 투자자(LP)들을 가지고 있다. LP들 간의 이해관계도 서로 다르다. KCGI 내에서도 한진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건설은 KCGI보다 더 버틸 가능성이 상당하다. 최종 의사결정권자가 권홍사 회장 1인으로 단일화돼 있고 지난해 지분 경쟁이 불붙었을 때 큰 비용을 치른 탓에 쉽사리 물러서기도 힘들다.
◆수년 후 한진칼 재매각설도
시장에서는 산업은행이 우군으로 나서면서 조 회장 일가가 경영권을 지켰지만 수년 후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산업은행으로 대표되는 정부가 조 회장을 지켜주었다기 보다는 수년간의 시간을 벌어주고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려고 할 것이라는 해석이다. 조 회장의 또 다른 백기사 델타항공도 지금은 항로 배정 등에서 이익을 모두 향유한 수년 후에는 지분을 팔 가능성이 없지 않다.
조 전 부사장이 나간다고 해서 반도건설이나 KCGI가 당장 지분을 털고 한진칼 경영권에서 손을 떼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버티면 다음 번 한진칼 경영권이 흔들릴 때 인수 후보에게 한꺼번에 지분을 매각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베팅이다. 혹은 다른 인수후보와 연합하여 그때야말로 '권토중래'를 노릴 수 있다. 그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헐값에 지분을 파는 것과 비교하면 차라리 '미래의 후속 M&A' 가능성을 기다리는 게 낫다고 생각할 여지가 존재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지금의 한진칼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모두 거느리고 있는 것이고, 아시아나항공 하나만 있을 때와 비교해 훨씬 매력적인 물건이 됐다"며 "조 회장 측에서 '빈틈'을 보여 만약 한진칼 주인이 바뀌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SK그룹이든 삼성그룹이든 관심을 갖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평가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