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 칼럼] '중기 상쟁' 부추기는 상생협력법

입력 2021-03-29 17:46
수정 2021-04-20 17:29
“법으로 단속해야 할 정도로 협력업체 기술을 빼앗는 대기업이 많나요.” “징벌적 손해배상을 앞세운 상생협력법은 사실상 ‘상생협박법’ 아닙니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협력법)’ 개정안에 대한 기업들의 반응이다. 법이라기보다는 권고나 지침 같은 이름의 상생협력법은 취지와 달리 대·중소기업을 적대적 관계로 만들고, 중소기업에 큰 피해를 줄 것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법안의 핵심은 ‘위탁자(원청기업)가 수탁자(하청기업)의 기술자료를 유용하면 손해액의 최대 3배를 배상’하도록 하는 것. 위탁자는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중소기업도 해당된다. 과잉입법 논란을 부른 ‘입증책임 전환’ 규정도 들어있다. 기술유출 소송이 걸리면 위탁자가 자사나 신규 거래처 기술이 기존 수탁자의 기술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입증책임을 원고나 사법기관이 아니라 피고에게 지웠다. 법 위반 행위의 입증책임은 손해배상을 청구한 원고에 있다는 민사법상 원칙을 무시했다.

2018년 3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도 하도급법상 기술유용 입증책임을 원사업자에게 지우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현행 법체계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산된 적이 있다. 아무런 권한도 없는 원사업자에게 입증책임을 지도록 하는 건 불합리하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이렇게 무리한 법조항이 어떻게 본회의 전 마지막 관문인 법사위까지 올라왔을까. 국회 상임위를 장악한 거대여당의 힘도 작용했지만, 소관부처인 중소벤처기업부가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려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법안이 통과되면 중기부는 기술유출 분쟁에 대한 조사권한 및 시정명령·개선권고, 검찰 고발권을 갖게 된다.

상생협력법 개정안은 ‘대기업은 약탈자’라는 선입관을 깔고 있지만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대·중소기업협력재단 자료(2017년 중소기업 기술보호 수준 실태조사)에 따르면 기술 유출·탈취 피해 유형은 ‘경쟁사로의 기술유출’이 42%로 가장 많았다. 당시 조사에서 대기업의 기술탈취는 ‘0%’로 나왔다. 상생협력법 개정안이 거래관계에 있는 중견·중소기업 간 분쟁을 키울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2018년 이후엔 이 통계를 발표하지 않고 있지만, 사회적 분위기나 정부의 태도를 감안하면 법을 고쳐 강력하게 처벌할 정도로 협력사 기술을 빼앗는 대기업이 급증했는지 의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의 ‘하도급거래 서면실태 조사’를 봐도 기술자료 유출·유용 혐의를 받는 원사업자 비율이 2017년 0.7%에서 2019년 0.5% 수준으로 감소했다. 기술유출 피해건수는 2019년 15건으로 사상 최저 수준이었다.

분쟁대상이 되는 기술자료에 대한 정의가 모호한 데다, 조사 및 처분 시효도 없어 수십 년 전의 일까지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상생협력법 개정안과 달리 하도급법은 조사 시효를 ‘거래가 끝난 날부터 3~7년’, 처분시효는 3년으로 정하고 있다. 기술 유용(침해)을 처벌하는 규정이 하도급법, 중소기업기술보호법, 부정경쟁방지법, 특허법 등에 이미 도입돼 있는 만큼 중복·과잉 제재라는 목소리도 높다.

거래처를 바꾸려면 ‘소송 리스크’를 감당해야 한다. 법안에 따르면 위탁기업이 기존 수탁기업과 비슷한 제품을 생산하는 제3자와 거래해도 기술유용 금지 위반으로 제소당할 수 있다. 위탁사업자가 분쟁을 피하기 위해 기존 업체와만 거래하면 혁신기술을 개발한 후발 중소벤처기업의 납품 기회는 막히게 된다.

기업들이 소송 위험을 피해 해외에서 협력대상을 물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애플처럼 부품뿐 아니라 생산까지 해외 업체에 맡기면 불필요한 논란에 휩싸일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