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이사와 감사위원의 책임은 무거워지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점차 제한되다 보니 여러 기업에서 제안이 오고 있다. 일부 교수는 투명성이 높지 않은 회사 이사회에 들어갔다가 잘못될까 봐 아예 제안을 고사하기도 한다.”
기업들이 찾는 사외이사 1순위로 꼽히는 한 서울 주요 대학 A교수는 높아지고 있는 사외이사 몸값에 대해 이처럼 말했다. 기업들의 눈높이는 높아지고 있지만 후보군 확대는 쉽지 않다. 그 결과는 여러 곳의 사외이사를 겹쳐 맡는 사례가 늘어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쏠리는 러브콜
한국경제신문이 올해 선임된 국내 시가총액 상위 100개 기업의 사외이사, 감사위원을 전수조사한 결과 37명이 두 곳 이상의 회사에서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전히 기업이 가장 선호하는 전직 고위 관료가 많았다. 이달 주주총회에서 삼성물산 사외이사로 선임된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은 CJ ENM의 사외이사와 감사위원도 맡고 있다. CJ ENM 측은 “지식경제부 장관 및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 등 풍부한 경험과 재무 전문가로서의 노하우”를 선임 배경으로 설명했다.
‘전관예우’ 풍토도 기업들이 고위직을 지낸 관료를 이사진으로 영입하는 이유로 꼽힌다. 삼성증권도 이번 주총에서 CJ대한통운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을 이사진에 포함시켰다. 주형환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호텔신라와 현대미포조선의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이 밖에 이전환 전 국세청 차장은 에쓰오일과 이마트, 정용선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보는 미래에셋증권과 금호석유화학,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은 SKC와 LF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기업인 출신들도 여러 기업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김상현 전 네이버 대표는 LG와 우아한형제들의 사외이사에, 이웅범 전 LG화학 전지사업본부장(사장)은 포스코케미칼과 현우산업 이사진에 이름을 올렸다. 기업인 혁신 DNA 심는다기업이 선호하는 사외이사 구성도 변화하고 있다. 올해는 교수, 금융인 비중이 줄어든 반면 기업인 선임 비중은 지난해 10%에서 20%로 늘었다. 대기업이 벤처업계로부터 비교적 젊은 경영자를 사외이사로 모시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한화솔루션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으로 선임된 이한주 베스핀글로벌 대표(49)가 대표적이다. 베스핀글로벌은 클라우드 환경으로의 이전, 구축, 운영 관리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클라우드 딜리버리 플랫폼 기업이다. 한화솔루션 이사회는 이 대표 선임 이유를 “미국과 국내에서 다수 회사를 창업해 성공적으로 운영한 경험이 있다”며 “회사가 적극적으로 추진 중인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과 관련해 전문성을 갖췄다”고 설명했다.
빅히트는 네시삼십삼분, 조이시티 등 스타트업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박영호 라구나인베스트먼트 대표(43)를, LG유플러스는 맥킨지앤컴퍼니 컨설턴트 출신인 제현주 옐로우독 대표(44)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관료보다 기업인을 선호하는 미국에선 기업인을 사외이사로 영입할 경우 혁신을 전파하는 통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덧붙였다. 여성 약진도 두드러져여성 기업인의 약진도 눈에 띄었다. SK는 김선희 매일유업 대표(57)를, LG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전문가인 이수영 전 코오롱에코원 대표(53)를 영입했다. 기업 간 여성 사외이사 모시기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올해 주총에서 일제히 ‘첫 여성 사외이사’ 선임 사실을 발표한 이유다. 기업평가 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 31곳이 올해 주총에서 첫 여성 사외이사 선임을 안건으로 올렸다. 시총 상위 100곳을 분석한 결과 총 33명의 여성 사외이사가 올해 선임됐다. 유정주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제도팀장은 “코로나19 이후 산업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사업 구조를 진단하고 어떤 신산업에 진출할지에 대한 기업들의 고민도 깊어졌다”며 “관련 분야에 전문성을 지닌 기업인 사외이사를 영입하는 사례가 늘어난 이유”라고 설명했다.
박재원/고재연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