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에 방한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25일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모든 관련국이 모든 종류의 군비 경쟁과 군사활동 활성화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비판은 없었다. 대신 미국 주도의 ‘쿼드(4개국 안보협력체)’를 겨냥한듯 ‘개방성’ 있는 지역 협력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라브로프 장관의 방한이 미국 견제 차원이라는 관측 속에서 민감한 외교 현안마다 전략적 모호성으로 일관하는 한국이 ‘약한 고리’가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라브로프 장관은 25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한·러 외교장관 회담을 갖고 이어진 언론 브리핑에서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지역에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러시아와 한국은 역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기 위해 모든 관련국 간의 협상 프로세스가 가능한 한 빨리 재개돼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날 오전 북한이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것과 관련해서는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는 정 장관과 달리 아무런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비경쟁의 주체를 ‘모든 관련국’이라 지칭하며 최근 연합군사훈련을 진행한 한·미를 겨냥했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개방적인’ 다자(多者) 협력체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한국 측이 많은 흥미로운 제안을 했고 우리가 갖고 있는 제안을 평가했다”며 “개방성 있는 포용적인 협의체 참여에 관심있다”고 말했다. 앞서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장관도 지난달 정 장관과의 첫 통화에서 “중국은 개방과 지역 협력 메커니즘을 지지한다”며 개방성을 강조한 바 있다.
미국이 ‘쿼드(4개국 안보협력체)’를 중·러 등 비(非)민주주의 국가에 대항한 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 확대하고 한국을 영입하려 한다는 움직임을 겨냥했다는 분석이다. 라브로프 장관은 방한에 앞서 지난 22일 중국을 찾아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장관과 회담을 갖고 “일방적인 괴롭힘과 타국 내정에 대한 간섭을 멈춰야 한다”고 미국을 정면 비판하기도 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2004년부터 17년째 외교장관을 맡고 있는 세계 ‘최장수’ 외교장관 중 한 명이다. 하지만 한국을 방문한 적은 많지 않다. 라브로프 장관이 마지막으로 한국을 찾은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방한할 때 대통령을 수행하기 위해 찾았던 2013년으로 올해 8년만에 다시 방한했다. 외교장관 단독으로 방한한 것은 2009년 남북한 동시 방문 이후 12년만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국방 장관이 첫 순방지로 한·일을 방문한 직후 중국을 거쳐 방한한 시점이 묘하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동북아 정세가 ‘미·일 대 중·러’로 고착화되는 상황에서 전략적 모호성으로 일관해온 한국 외교가 시험대에 올랐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2016년 미국 대선개입 의혹과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러시아가 애매모호한 목소리를 내 ‘약한 고리’가 된 한국을 공략하는 것”이라며 “북·중·러 삼각 공조가 강화될수록 한국이 고립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