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1일 개봉하는 이준익 감독(사진)의 신작 ‘자산어보’는 일반 사극과 사뭇 다르다. 정약용에 비해 덜 알려진 정약전, 나라와 정치가 아니라 물고기에 대한 소소한 정보를 담은 책 《자산어보》 이야기다.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정약전이 유배를 간 흑산도의 아름다운 풍경,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웃음과 눈물이 담겨 있다.
이 감독은 지난 19일 인터뷰에서 “이전에 역사를 공부할 땐 ‘망원경’을 들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건이나 제도, 왕을 중심으로 보도록 배웠다”며 “이젠 역사도 미시적인 관점에서 ‘현미경’으로 보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강조했다. 영웅처럼 큰일은 하지 않았지만 의미 있는 인물을 통해 그 시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 사극도 이젠 현대물처럼 일상성을 다뤄야 한다는 얘기다. 허구 인물 ‘창대’ 통해 드러낸 정약전이 감독은 ‘역사 덕후’다. 필모그래피의 절반이 사극일 정도다. 첫 사극 ‘왕의 남자’(2005)로 1000만 관객 기록을 썼고 ‘사도’(2014) ‘동주’(2015) ‘박열’(2017) 등을 잇달아 연출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전과 정약용은 순조가 왕위에 오르며 유배를 떠나게 된다. 각각의 유배지는 흑산도와 강진.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과 달리 유배지에서 성리학 대신 바다와 물고기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양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서자로, 물고기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창대라는 인물의 도움을 받아 《자산어보》를 쓴다. 배우 설경구가 정약전 역을, 변요한이 창대 역을 맡았다.
창대는 이 감독이 정약전의 이야기를 위해 만든 캐릭터지만 《자산어보》 서문과 본문에서 정약전이 언급한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이 감독은 여기에 허구의 이야기를 더해 새로운 캐릭터를 완성했다. 창대는 글 읽는 걸 좋아하는 영특한 인물이다. 양반이 돼 벼슬을 하고 싶은 욕망도 강렬하다. 창대는 정약전으로부터 글을 배우면서도 스승의 철학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정약전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상대적 개념으로 창대의 여정을 부각했습니다. 창대의 내재된 욕망이 정약전이라는 인물을 만나 어떤 변화를 겪는데, 그 변화는 참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번데기가 변태를 통해 삶의 결과를 책임지는 종점까지 가도록 했죠.”
영화는 정약전과 정약용의 상반된 생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창대와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강기영 분)의 시 배틀 장면으로 이를 드러낸다. ‘동주’처럼 영화 전반엔 시가 흐른다. 이 감독은 “시대의 아픔을 시로 서술했다”며 “시대를 아파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고 단언했다. 수묵화처럼 펼쳐진 흑백의 절경시와 함께 영화는 한 편의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동주’와 마찬가지로 흑백 화면으로 찍어 그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흑백이라 흑산도의 절경을 담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기우다.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 물고기의 펄떡이는 움직임이 스크린 가득 펼쳐진다.
“컬러로 찍을 땐 카메라를 가까이 가져가야 하는데 흑백으로 찍을 땐 카메라가 뒤로 쭉 빠져요. 공간을 더 크게 볼 수 있죠. 그래서 채우는 것을 고민하는 동시에 어디를 비워야 할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엔 컬러 장면으로 마무리했다. 어두운 의미의 ‘흑산’이 아니라 밝고 아름다운 ‘자산’의 의미를 담았다. 컬러 전환으로 영화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현재를 반영하지 않을 거라면 사극을 왜 찍겠어요. 옛날이야기라도 지금의 이야기와 얼마나 맞닿는지 고민하며 만들었습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