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사진)이 1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증시 상장을 통해 확보한 5조원 규모의 자금을 한국에 재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대규모 자금 조달 외에 차등의결권 역시 한국 대신 미국행(行)을 선택한 배경 중 하나라고 말했다.
김 의장은 뉴욕 주재 한국 특파원들과의 화상 간담회에서 “세계적인 기업들이 경쟁하는 무대에서 한국 유니콘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도 경쟁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상장 배경을 밝혔다. 그는 “가장 큰 목적은 투자 자금 유치였지만 차등의결권을 활용할 수 있는 점도 (미국행에)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차등의결권은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 경영자의 보유 주식에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미국 일본 중국 등 주요국과 달리 한국은 도입하지 않고 있다. 김 의장은 일반주식(클래스A) 대비 의결권이 29배 많은 클래스B를 100% 보유해 76.7%의 의결권을 갖게 됐다.
김 의장은 “이번에 조달한 자금으로 전국 물류망을 확충하는 등 국내 입지를 더 단단하게 다지는 데 주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유통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데 공격적으로 나서겠다는 얘기다. 쿠팡의 작년 국내 전자상거래 시장 점유율은 13.0%로 네이버(16.6%)를 바짝 쫓고 있다.
그는 “세계 전자상거래 시장을 주름잡는 미국 아마존과 중국 알리바바가 장악하지 못한 유일한 대형 시장이 한국”이라며 “대규모 새벽배송과 혁신적인 반품 서비스는 아마존도 따라잡지 못하는 우리만의 강점”이라고 했다.
이날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쿠팡은 공모가(주당 35달러) 대비 40.71% 오른 49.25달러에 마감했다. 시가총액은 886억5000만달러(약 100조5700억원)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이어 단숨에 국내 기업 3위로 도약했다.
쿠팡이 이번 기업공개(IPO)로 조달한 자금은 45억5000만달러다. 43세인 김 의장은 갑부 반열에 오르게 됐다. 지분 10.2%를 확보한 그의 주식 평가액은 이날 종가 기준으로 90억달러에 육박한다.김범석 이사회 의장 인터뷰
"이베이·요기요 인수 관심 없어…쿠팡만의 DNA 심는 데 집중"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은 최근 진행 중인 국내 유통업계의 합종연횡에 거리를 두는 모습이었다. 이베이코리아, 요기요 등 다른 배달앱 회사를 인수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인수합병(M&A)에 대해 문을 닫았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확신이 서지 않으면 안 하는 게 낫다”며 “우리만의 DNA를 정립하는 데 집중할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유통업계에선 그동안 쿠팡이 막대한 상장 자금을 바탕으로 경쟁사 인수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단숨에 e커머스(전자상거래) 시장 1위 자리를 차지하면서 ‘규모의 경제’ 효과를 노릴 수 있어서다. 하지만 김 의장은 “M&A의 경우 비즈니스 관점으로만 접근해선 안 되고 반드시 문화적인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며 “사실상 쉽지 않다”고 했다.
누적 적자 문제와 관련해선 “적자로 보지 않고 투자였다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그러면서 “공격적이고 계획적으로 투자를 지속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쿠팡의 작년 말 기준 누적 적자는 4조6700억원에 달한다. 상장 기업으로서 적자가 계속 쌓이는 상황이 부담스러운 만큼 투자를 줄이고 내실을 기하는 흑자 전환 전략을 짤 것이란 관측이 있었지만 일축한 것이다.
김 의장은 쿠팡이 국내 기업 중 세 번째로 많은 5만여 명을 고용하고 있지만 앞으로 2025년까지 5만 명을 추가로 직고용하겠다고 밝혔다. 촘촘한 전국 당일배송망을 구축하려면 더 많은 기지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인기투표하듯이 여러 결정을 내려왔다면 지금의 쿠팡이나 로켓배송은 없었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비상장 기업이었을 때처럼 우리 고객에게 충실하고 장기 가치 창출에 전념하며 단기적인 일에는 영원히 신경쓰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아마존을 벤치마킹했지만 아마존보다 월등한 서비스로 차별화했다는 게 김 의장의 설명이다. 그는 “삼성전자가 일본 소니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혁신 DNA 덕분에 소니를 능가할 수 있었다”며 “집 앞에서 배송기사를 통해 즉각적으로 반품 처리를 할 수 있는 혁신적인 서비스는 미국에서도 부러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 시장에 진출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김 의장은 “장기적으로 그런 꿈이 없다고 말할 순 없다”면서도 “한국의 전자상거래 시장만 해도 한 해 530조원이 넘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일단 국내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김 의장은 이날 오전 미 경제매체 CNBC와의 인터뷰에선 “한국인들의 창의성이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다”며 “믿을 수 없는 스토리의 작은 일부가 돼 너무 흥분된다”고 말했다. 이어 “1960년 한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79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세계 10위권 대국이 됐다”고 소개했다.
로켓배송 서비스가 인구밀도가 높은 한국 외에 다른 나라에서도 가능할지에 대한 질문에는 “쿠팡은 인구가 집중된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을 포함한 전국으로 서비스를 확대했다”고 말했다.
이날 쿠팡의 성공적인 뉴욕증시 데뷔로 김 의장을 포함한 주요 주주는 대박을 터뜨리게 됐다. 지분 33.1%를 확보한 최대주주 소프트뱅크의 평가 차익은 투자금(30억달러)의 10배가 넘는다. 벤처투자사 그린옥스캐피털(16.6%), 닐 메타 그린옥스 창업자(16.6%), 김 의장(10.2%), 헤지펀드 매버릭홀딩스(6.4%), 투자사 로즈파크어드바이저스(5.1%) 등 다른 주요 주주도 마찬가지다.
쿠팡 임직원 역시 상당한 차익을 거둘 전망이다. 직원에게 부여된 스톡옵션(주식매수 청구권)이 작년 말 기준 6570만여 주에 달해서다. 스톡옵션의 평균 행사가격은 주당 1.95달러다. 단순 계산으로도 20~30배 차익을 챙길 수 있다.
뉴욕=조재길 특파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