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소통법…길을 내주고 사람을 얻었다

입력 2021-03-11 17:34
수정 2021-03-12 02:46

서울 한남동 대사관로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밝은 회색 벽돌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5층 높이의 서점에 지그재그로 배치한 하얀색 계단이 시선을 잡아끈다. 식당과 카페등이 자리잡고 있는 좁은 골목길 같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자그마한 중정이 살포시 모습을 드러낸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아기자기하게 배치된 미술 갤러리, 안경점, 꽃집 등을 찾아내는 즐거움이 있다. 마치 유럽의 작은 마을을 옮겨 놓은 것 같은 복합공간 사운즈한남이다. 지역주민이 언제든 쉴 수 있는 공간사운즈한남을 설계한 박상준 JAD 대표는 지역사회와 공존하는 ‘공공성의 가치’에 주목하는 건축가다. 주거지나 상업시설을 지을 때 인근 지역 주민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길이나 녹지공원 등을 조성해 공공성을 높이는 작업들을 해왔다.

박 대표는 “사유지의 일부를 공공에 개방한다는 것은 건축주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약간의 공공성을 부여해 지역주민의 지지를 받는 공간으로 자리잡으면 건물 가치가 자연스럽게 상승한다”는 설명이다. 지역주민이 언제든 와서 쉴 수 있도록 건물 일부를 개방하면 24시간 사람들이 북적이고, 자연스럽게 유동인구가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구현한 대표적인 공간이 사운즈한남이다. 한남동 성당 옆 1650㎡ 부지를 주거, 상업, 사무실 등으로 나눠 5개 동으로 구성한 복합공간으로 2018년 문을 열었다. 부지의 중심 동을 스틸북스라는 서점으로 조성해 지역주민이 ‘공공 서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나머지 동의 저층부에는 갤러리, 식당, 꽃집, 안경점 등 다양한 공간을 구석구석 배치했다.

건물을 관통하는 길 두 곳을 뚫어 지역주민들이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한 데에도 공공성의 철학이 배어 있다. 박 대표는 “주 7일, 24시간 북적거리는 사람 냄새 나는 공간으로 조성하고 싶었다”며 “주거시설이나 사무실 일변도로 구성했다면 일정 시간대에는 사람이 거의 오가지 않는 죽은 공간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치를 높이는 공간 브랜딩사운즈한남 전반에 이런 철학이 일관되게 적용된 것은 한 곳에서 기획부터 설계, 운영, 마케팅까지 모두 맡아 주도했기 때문이다. 사운즈한남은 현재 카카오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조수용 대표가 설립한 디자인회사 JOH의 작품이다. JOH는 선도적으로 설계, 디자인, 임대 등을 한 업체가 총괄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디자인 전문가 조 대표가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던 박 대표를 건축 총괄로 영입해 2010년 설립한 JOH는 ‘공간 브랜딩’의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건축주의 땅을 어떤 가치로 브랜딩할 수 있을지 먼저 구상한 뒤 그 핵심 가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건물을 설계했다. 통상 시행사들이 건물부터 짓고 구체적인 용도를 나중에 정하는 것과는 다른 접근 방식이었다.

대림산업의 디뮤지엄, 광화문 오피스빌딩 디타워, 영종도 네스트호텔, 여의도 글래드호텔을 비롯해 사운즈한남까지 모두 JOH의 이름으로 지었다. 이 과정에서 박 대표는 브랜딩 전문가 조 대표의 ‘공간 브랜딩’ 개념을 자신의 건축 철학에 자연스레 접목했다. 2018년 사운즈한남이 문을 연 뒤 카카오가 JOH를 인수하자 박 대표는 JAD를 설립하며 독립을 택했다. 박 대표는 “대기업 안에 머무르기보다 공간 브랜딩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이어가면서 기존보다 반발짝 진화한 건축을 계속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공간 브랜딩과 공공성을 가미한 건축은 이어지고 있다. 최근 서울 가산동에 착공한 지식산업센터 ‘퍼블릭’에도 JAD의 공간 철학이 스며들어 있다. 녹지가 부족한 금천구 주민을 위해 건물은 부지 바깥쪽에 배치하고 가운데 넓은 공간을 대형 녹지공원으로 꾸민다. 건물도 계단식으로 깎아 옥상정원을 조성한다. 부지 전체에 우거진 녹음을 선사하기 위함이다.

중랑구 상봉버스터미널 복합개발도 공공성에 방점을 찍어 기획하고 있다. 문화시설이 부족한 중랑구민을 위해 주상복합건물에 도서관 등을 넣어 인근 지역 주민들과 함께 공존한다는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머무르고 싶은 따뜻한 공간을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이용자의 눈높이에서 다시 찾고 싶은 공간을 설계하고 지역 주민들과 공존할 수 있다면 그 공간은 지속가능하겠죠.”

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