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3월08일(17:39)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최근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선 지난 5일까지 46거래일 연속 국내 주식 순매도를 이어가고 있는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언제 매도세를 멈출지가 이슈로 떠올랐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연기금의 국내주식 보유 비율을 높여 개미들의 눈물을 닦아달라’는 청원이 올라오고, 일부 개인 투자자들은 전주 국민연금 본사에 찾아가 “국민연금이 주가하락의 주범”이라 외치며 규탄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순매도 행진이 안정적 수익을 확보하기 위한 중장기적 리밸런싱(자산배분)의 일환으로, 국민 노후자금 운용의 건전성 유지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것이 국민연금의 일관된 입장이지만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다수의 언론들이 경쟁하듯 앞으로의 연기금 매도 물량이 20조원 가량 남았다는 추정을 내놓으며 투자자들을 자극하고, 일각에선 보건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으로 경영계, 노동계 등 민간 위원들로 구성된 국민연금 최고의사결정기구 기금운용위원회가 나서 국민연금의 매도세를 막을 것이란 '희망론'까지 내놓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어디까지가 맞는 것일까. 최대한 객관적으로, 최근 논란의 시비를 가려봤다.
◆국민연금이 정말 올해 주식 20조 '팔아야만' 할까
일단 국민연금의 매도 물량이 얼마만큼 남았다는 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상당수의 추정은 작년 12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전체 운용자산(833조 7000억원)에서 국내주식이 차지하는 비중(21.2%)와 국민연금의 5년 단위 자산배분 계획인 중기자산배분 상 올해의 목표 비중 16.8%간 차이를 바탕으로 매도 규모를 추정한다. 현재 비중과 목표 비중의 차이에서 최근까지 연기금의 순매도 물량 중 국민연금이 차지할 비중을 어림산해 추정하는 식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유연한 대응을 위해 총 ±5%포인트까지 국내 주식 보유 한도를 두고 있다. 16.8%에 5%포인트를 더하면 21.8%로 최근 국내외 주식 시장의 조정을 감안하면 적어도 국민연금이 아무런 고려 없이 기계적으로 주식을 던졌고, 연말까지 ‘무조건’ 판다는 식의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 ‘팔 수도 있다’고 보는것이 합리적이다. 허용범위가 넓은 만큼 그간 순매도가 없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팔았다는 것은 기금운용을 담당하는 전문가 집단인 기금운용본부가 일단 수익 실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연기금 순매도가 46거래일 지속된 지금도 한국 주식 시장은 코스피 기준 3개월 전에 비해 10.79% 오른 상태다. 같은 기간 미국 나스닥은 3.66% S&P500은 3.86% 오르는 데 그쳤다. 일본, 중국, 홍콩 등에 비해서도 높은 상태다. 한 기관 최고투자책임자(CIO)는 “국민 노후자금 운용이 원칙과 데이터에 기반해 이뤄져야 한다는데 반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라며 “세력화된 일부 투자자를 위해 국민연금을 압박하는 행태는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
◆기금위가 매도세 멈출까..."국내주식 비중 다시 높이는 것은 오명 남기는 것"
기금위가 매도세를 멈출 것이란 ‘희망론’은 일단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2025년까지 국내 주식 비중을 15%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 중기자산배분안을 짜는 것도, 변경하는 것도 기금위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지난 달 24일 열린 기금위에서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이 연기금 순매도와 관련해 “리밸런싱을 어떻게 할지 검토하겠다”고 밝히면서 매월 말 열리는 기금위에서 어떤 식으로든 리밸런싱은 논의될 전망이다.
하지만 만약 기금위가 국내 주식의 목표 비중을 높이는 식의 결정을 내릴 경우, 이는 국민연금 역사의 오명으로 남을 것이란 것이 상당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현재의 국민연금의 기조는 2018년 기금위가 당초 20% 내외로 규정됐던 국내 주식 비중을 5년 뒤인 2023년까지 15%로 축소시키는데 합의하면서 결정됐다. 글로벌 주식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에 미치지 않음에도 전체 자산의 20% 가까이를 국내 주식에 투자하는 것이 기금운용의 수익성과 안정성을 떨어뜨린다는 공감대에서 이뤄진 조치다.
비공개 사안으로 부쳐져 있지만 매년 5월 이뤄지는 중기자산배분 논의 과정에서 발표되는 내부 시뮬레이션 결과는 국민연금이 적정 리스크 수준 하에서 목표 수익률을 달성하기 위해선 국내 주식을 0%에 수렴할 정도로 낮춰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신 해외 주식 및 대체투자 비중을 늘리라는 것이 시뮬레이션의 결론이다. 2018년 이후 국민연금이 추진해온 조치들은 모두 이 같은 데이터에 기반을 두고 있다. 향후 2025년까지 해외 투자 비중을 현재 35%에서 55%까지 늘린다는 ‘해외투자종합계획’, 목표 기한을 연장해가며 국내 주식 축소 방침을 고수한 지난 3년 간의 중기자산배분이 그 결론이다.
한 기금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을 지금처럼 15% 넘게 보유하는 것 자체가 국내 시장 안정이라는 정성적 고려로 유지되는 것"이라며 "지난 몇 해간 긴 토론과 논의를 거쳐 낸 결론이 일부 투자자들의 원성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일갈했다.
◆오늘의 이익이 미래세대에겐 부담으로...결국은 '조삼모사'
오늘의 반대는 내일의 부담으로 찾아오는 ‘조삼모사’라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재정추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기금은 2041년 1778조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차차 줄어들어 2057년 완전히 고갈될 예정이다. 현행 보험료율이 유지될 경우 2030년부터 국민연금이 그 해 지급할 연금을 보험료만으로 충당하지 못한다는 국회 예산정책처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예정된 미래가 도래하면 20년 후엔 사는 것보다 파는 것이 국민연금의 주 업무가 된다. 국민연금이 국내주식을 현재 중기자산배분 목표치인 15%로 유지할 경우, 약 20년 뒤부터 고갈 시점까지 해마다 17조원어치씩 팔아치워야 한다. 지금 주식 비중을 줄이지 않으면 언젠가 그 자산을 매도해 연금 가입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 시장에 미칠 충격은 국민연금 가입자 전체와 미래의 투자자가 떠안게 된다는 얘기다.
고갈 이후까지 지속가능한 투자 방식을 고려한다면 국내주식 비중은 1%도 많다는 것이 국민연금 내 전문가들의 일관된 분석이다. 비공개에 부쳐져 있지만 중기자산배분안 결정 과정에서 매년 이뤄지는 국민연금 내부 연구결과는 국내주식을 0%에 수렴할 정도로 낮추고 해외주식과 대체투자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물론 국민연금 비판자들의 주장처럼 올해가 한국 증시의 ‘변곡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모험적 베팅으로 돈을 버는 헤지펀드가 아니다. 국민의 노후를 위해 최소한의 안정성을 지키며 운용하는 연기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