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테러' 후 北 버린 미얀마, 쿠데타로 美 버리고 中?[송영찬의 디플로마티크]

입력 2021-03-06 13:00
수정 2021-04-04 00:02
1983년 10월 9일. 양복을 입은 정부 관계자들이 도열하자 나팔수들이 진혼곡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연주가 몇 소절 진행되지도 않던 찰나, 굉음과 함께 현장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폭발과 함께 목조 건물은 그대로 주저 앉았고 21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습니다. 이날 미얀마 양곤에서 북한이 일으킨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입니다.

미얀마는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의 첫 방문국이었습니다. 일정이 지연돼 현장에 늦게 도착한 대통령과 대변인은 화를 면했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고(故) 서석준 경제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등 정부의 최고위직 관료와 경호원, 취재진 등을 포함해 총 17명의 국내 인사들이 사망합니다. 당시 진혼곡을 연주하던 나팔수 등 미얀마인도 4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정부 최고위직 관료들이 이처럼 한 번에 세상을 떠난 일은 없었습니다. ○‘제3세계 남북 외교전’ 승리 계기된 테러
북한 테러범들의 대통령 암살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외교적인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국제법에서도 국가원수 암살이나 암살시도는 선전포고에 준하는 것으로 봅니다. 북한은 이에 앞서서도 한국 대통령 암살 작전을 펼친적이 있었습니다. 1968년 일명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1·21사태와 1974년 고(故) 육영수 여사가 암살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영토도 아닌 해외 영토에서 행정부 인사들을 한꺼번에 폭살하려는 시도는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이 사건에 대한 미얀마의 분노는 엄청났습니다. 테러가 발생한 곳은 미얀마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아웅산의 묘소였습니다. 거꾸로 생각한다면 제3국이 김일성, 김정일의 시신이 있는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을 폭파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목조 건물이었던 아웅산 묘소는 모두 파괴됐을 뿐 아니라 하마터면 미얀마도 국제사회로부터 테러의 배후에 있다는 오해까지 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미얀마는 테러 직후 북한과 단교합니다. 미얀마는 그 전까지 남북한 모두와 수교하고 있었지만 군부가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고 있던 터라 통상 북한과 더 가까운 나라로 인식됐습니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해외 순방국에 미얀마를 추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정부 내에서 반대가 상당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남북은 현재 중국과 대만처럼 제3세계 국가들을 소위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엄청난 외교전을 펼칠 때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제3세계 국가들은 줄줄이 북한에서 돌아섭니다. 미얀마를 제외하고도 코스타리카·코모로·서사모아 등이 북한과 단교합니다. 대북(對北) 규탄 성명에는 전세계 69개국이 참여합니다. ○'국부의 딸'에서 '민주화의 꽃'으로
‘아웅산 테러’로부터 38년이 흐른 지금, 미얀마는 다시 국제사회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습니다. 53년간 미얀마를 장악해 통치하던 군부가 지난달 2015년부터 ‘반쪽’이나마 실시된 민주화를 뒤엎고 다시 쿠데타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군부의 쿠데타 명목은 ‘총선 결과 불복’입니다. 민주화 세력인 국민민주연맹이 지난해 11월 실시된 총선에서 ‘선거로 뽑는’ 75% 의석 중 83.2% 득표율을 기록한 것입니다. 미얀마는 2015년 자유선거 도입 이후에도 전체의 25% 의석은 군부가 임명해 왔습니다.

민주화 세력의 총선 승리를 주도한 인물은 1983년 테러 현장인 묘소의 주인공이자 미얀마의 국부인 아웅산의 딸, 아웅산수지입니다. 아웅산수지 고문은 인도, 영국, 일본 등지에서 학위와 가정 생활을 병행하던 중 1988년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미얀마로 귀국합니다. 이때 ‘8888항쟁’이라 불리던 군부 독재에 반대 집회에 참여하면서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로 급부상합니다. 하지만 번번이 민주화는 실패했고, 수지 고문은 1989년부터 6년간, 2000년부터 2년간, 그리고 2003년부터 7년간 다시 가택연금을 당합니다. 결국 2015년 총선에서 압승하며 단독 정부 수립에 성공하고 국가고문 자리에 올랐지만 올해 다시 구금됩니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미얀마 시민들의 시위는 예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모두 활발하게 SNS를 활용해 서로 연대하고, 국제사회에 군부의 강제 진압 참상을 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군부는 끄떡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군부의 강경진압으로 지난 3일 하루에만 최소 38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에 앞서 지난달 28일에도 1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미얀마 경찰은 시위대 진압 과정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구금된 사람의 수만 1700명 이상이고 체포된 언론인만 29명 이상으로 알려졌습니다. ○親中 군부의 민주화 뒤엎기
주목할 만한 점은 미얀마의 쿠데타를 놓고 미·중 양국이 너무나 뚜렷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쿠데타 직후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복원할 것을 촉구한다”며 군부를 비판한데 이어 지난달 21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자신의 트위터에 “미얀마 국민에 대한 폭력을 자행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단호한 조치를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이 사태에 대해 “중국이 바라는 상황은 아니다”라며 중립적인 모양새를 취하고 있습니다.

미얀마 현지에서는 군부의 배후에 중국이 있다는 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반중(反中) 정서도 크게 확대되고 있습니다. 쿠데타 후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미얀마 국방부 등을 수출 규제 명단에 올렸고 군부 인사 9명에 대해서는 인권 제재를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미얀마 군부의 소 윈 부사령관은 “우리는 제재에 익숙하고, 살아남았다”며 “우리는 소수의 친구와 함께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현지 매체들은 일제히 소 윈 부사령관이 말한 '소수의 친구'가 중국일 것이라고 꼽았습니다.

왕이 중국 국무위원겸 외교장관은 지난 1월 쿠데타 발생 불과 3주전 동남아 순방에서 미얀마를 방문했습니다. 이때 왕 장관은 이번 쿠데타를 주도한 아훙 흘라잉 최고사령관을 별도로 면담합니다. 중국이 이번 사태의 배후에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국제 여론이 급격히 안 좋아지자 주미얀마 중국대사가 “현재 정치 상황은 중국이 바라는 바가 절대 아니다”라고 해명했으나 ‘쿠데타 중국 배후설’은 오히려 날로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대중(對中) 강경노선을 천명해온 조 바이든 미 대통령에게 미얀마는 외교 시험대가 될 전망입니다. 미얀마 군부를 강력하게 제재하자니 군부가 중국에 완전히 경도될 수 있고, 내버려둬도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묵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는 미얀마 사태에 있어서는 초기부터 일관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부는 쿠데타 발발 직후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몇 차례 발표하고 “정부는 미얀마에서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에 매우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며 군부를 비판해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6일 자신의 SNS에 “미얀마 군과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을 규탄하며 아웅산수지 국가고문을 비롯해 구금된 인사들의 즉각 석방을 강력히 촉구한다”며 아시아 국가 정상으로서는 처음으로 미얀마 군부 비판 성명을 냈습니다. 제3국의 문제에 대해 정부가 이토록 단호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이례적입니다. 미얀마가 정치·경제적으로 한국과 크게 밀접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문제는 미얀마 사태가 장기화될수록 한국 외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선 바이든 행정부의 대외정책에서 한반도 문제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있습니다. 지난 1월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는 아직까지 대북 정책의 기조를 분명히 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미얀마 사태가 미·중 갈등의 핵심축으로 부상할 경우에는 우리 정부가 꺼리는 반중 전선에의 참여 압박이 더욱 거세질 수 있습니다. 특히 미얀마 쿠데타는 바이든 행정부가 대외정책의 핵심 기조로 삼겠다고 강조해온 인권과 민주주의에 가장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사태입니다. 미국이 만일 미얀마 사태를 명분으로 삼아 반중 안보 협의체 ‘쿼드(Quad)’ 확대 등을 노린다면 그 첫번째 영입대상은 한국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얀마인들의 오랜 꿈인 민주주의는 5년만에 허망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지난 3일 군부 총탄에 사망한 19살 소녀 찰 신이 입고 있던 피묻은 티셔츠에는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과 너무나 상반되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Everything will be OK(다 잘될 거야)’. 과연 세계 패권 경쟁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 미얀마가 이 소녀의 바람처럼 'OK'라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요.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