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통인동 서촌 골목. 굽이진 길목 안에 기와를 얹은 한옥 한 채가 보였다. 문을 열자 반기는 것은 세계 각지에서 건너온 위스키 병과 잔잔한 피아노 재즈곡. 조도를 한껏 낮춘 조명 안에서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함께 어우러졌다. 바에선 분홍 셔츠를 입은 바텐더 네 명이 위스키 병을 손에 들고 술의 맛과 유래를 소개했다.
지난 3일 서촌 바 ‘참’은 오후 6시께부터 바 테이블 10석이 가득 찼다. 30대로 보이는 이들은 서로 다른 술을 앞에 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위스키를 즐겼다. 임병진 참 대표는 “고객들은 술뿐만 아니라 바의 음악, 조명, 분위기부터 바텐더 서비스까지 다양한 요소를 즐기고자 한다”며 “최근 위스키 문화를 즐기는 2030세대가 많아지면서 바 문화도 다양해지는 추세”라고 했다.
최근 2030세대에게 위스키 문화가 인기다. 소주와 소맥(소주+맥주), 폭음으로 얼룩진 음주 생활에서 벗어나 ‘취향에 맞게 한 잔이라도 제대로 마시자’는 주의다. 바 투어부터 ‘홈텐딩(홈+바텐딩)’까지 다양한 트렌드도 생겼다.
직장인 심모씨(27)에게 매주 금요일은 ‘위스키 데이’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으로 이른 시간에 술집 문이 닫히자 아쉬운 마음에 홀로 위스키 한두 잔을 마시던 것이 그를 ‘혼스키(혼자 위스키 마시기)’에 빠지게 했다. 그는 “한 달에 10만~15만원을 위스키 사는 데 쓴다”며 “소주는 마시면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 드는데, 위스키는 특유의 맛과 향이 있다”고 말했다.
직장인 전모씨(30)는 혼술로 위스키를 즐기다 어느덧 집 진열장에 위스키 다섯 병을 모았다. 전씨는 “회식 때마다 마시는 소주와 맥주를 굳이 집에서도 마실 이유는 없다”며 “위스키는 맛과 향도 진하고 숙취가 덜한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처음 위스키에 빠진 직장인 A씨(30)는 “위스키를 이용한 칵테일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 조주기능사 자격증 취득에 도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혼스키 족이 늘면서 서울 남대문시장 내 주류상가에는 젊은 손님이 부쩍 많아졌다. 토요일이던 지난달 27일 남대문주류상가 D동 안에서는 20대로 보이는 10여 명이 저마다 취향에 맞는 위스키를 고르고 있었다. 연인부터 두세 명의 친구끼리 온 사람 등 다양했다. “부드러운 맛을 찾는다”는 질문에 주류점 주인은 시음을 권하기도 했다. 이날 친구와 함께 온 대학생 이모씨(21)는 “소주는 쓰기만 하고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며 “위스키 바에서 마시면 값이 비싸 직접 남대문 주류상가에 위스키를 사러 왔다”고 말했다.
젊은 취향에 맞춰 위스키 바도 각기 다른 콘셉트를 선보이고 있다. 스피크이지 바(Speakeasy Bar)가 대표적이다. ‘조용히 말한다’는 뜻으로 1920년대 미국 금주법 시대에 몰래 운영하던 술집에서 유래됐다. 스피크이지 바는 대개 간판이 없다. 후미진 상가 건물이나 골목에 있어 입구도 찾기 어렵다.
한남동 한 골목에 있는 바 ‘블라인드 피그’는 입구가 낮아 허리를 잔뜩 숙이고 입장해야 한다. 청담동에 있는 바 ‘PDR’은 입구 자체가 신발장 모양으로 꾸며져 있다. 합정동의 바 ‘문학살롱 초고’는 위스키를 마시며 독서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이런 비밀스러운 바들이 ‘나만의 공간’으로 인식 돼 2030의 ‘핫플레이스’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직장인 강모씨(30)는 “맛집 목록에 적어 두고 매달 숨겨진 위스키 바를 찾아다니는 것이 취미”라며 “위스키 바를 가면 적당한 가격에 고급 문화를 즐기는 ‘작은 사치’를 할 수 있어 만족한다”고 했다. 임 대표는 “바의 공간이 주는 재미도 젊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요인”이라며 “한남동 청담동 내자동 등에 있는 여러 바를 투어하는 이도 많다”고 설명했다.
양길성/김남영/최다은 기자 vertig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