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초기 스타트업이 ‘투자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다. 경기가 급격하게 위축되며 액셀러레이터(AC), 벤처캐피털(VC) 등 스타트업 투자자들이 불확실성이 높은 초기 투자를 꺼린 탓이다. 초기 스타트업 투자 비율을 줄인 정부 책임론도 제기된다. 업계에선 “가장 어린 기업으로 볼 수 있는 초기 스타트업 투자 공백은 장기적으로 국내 전체 스타트업 생태계는 물론 나아가 산업 생태계 자체를 뒤흔드는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극심한 ‘보릿고개’ 초기 스타트업2018년 창업한 다이나믹케어는 로봇 헬스기계로 혼자서도 운동할 수 있게 도와주는 ‘파워로그’를 개발한 스타트업이다. 지난해 초에는 세 곳의 투자자로부터 최초 투자 제안을 받았다. 다이나믹케어는 이 중 투자금 10억원을 제안한 곳과 협상을 이어갔고, 최종 사인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그러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협상을 진행 중이던 투자자는 계약을 무기한 보류한다고 통보했다. 구송광 다이나믹케어 대표는 “개인 운동을 도울 수 있어 코로나19 사태가 호재로 작용할 것이라 생각했다”며 “아이템과는 무관하게 초기 스타트업 최초 투자는 위험하다며 투자자들이 떠나갔다”고 토로했다.
코로나19로 상대적인 수혜를 본 것으로 알려진 게임산업에서도 초기 스타트업만큼은 예외였다. 게임 스타트업 뤼미에르는 “투자자들과 만날 기회조차도 없었다”고 털어놨다. 투자자들이 확실한 실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초기 스타트업이다 보니 실적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다급해진 뤼미에르는 투자금 없이 서둘러 지난해 8월 신작을 출시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김유리 뤼미에르 대표는 “완성이 되고 나서야 다행히 투자 미팅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며 “다른 선택이 없었다”고 말했다.
투자금을 유치했어도 당초 기대보다 대폭 줄어든 것이 허다하다. 정보기술(IT) 법률 서비스 스타트업 H사는 기업 가치 40억원을 인정받고 4억원의 투자금을 받는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됐지만 코로나19로 계약이 무산됐다. 이후 다른 투자자를 찾아 지난해 7월 기업 가치 20억원에 투자금 2억원을 가까스로 유치했다. 이 회사 대표는 “초기 기업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분위기여서 몸값을 협상할 처지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스타트업 투자정보 업체 더브이씨에 따르면 최초의 투자 유치를 의미하는 ‘시드 투자’ 규모가 지난해 2019년 대비 41.2% 줄어들었다. 코로나19로 투자시장이 전반적으로 위축됐지만 스타트업 전체 투자금액(프리A, 시리즈A~C 단계)이 11.5% 줄어든 것에 비하면 네 배 가량 감소폭이 큰 셈이다. 반면 시드 투자를 이미 유치한 기업이 다음 단계로 받는 시리즈A 투자는 29.7% 늘었다. 위험 회피를 한 투자자들이 한 단계 검증을 거치고 성장 단계에 들어선 기업들에만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민간 투자는 한계…정부 역할 절실”장기적으론 스타트업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는 “그동안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시드 투자가 그만큼 활발히 이뤄졌기 때문”이라며 “시드 투자가 위축되면 새로운 인물, 아이디어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에 따른 경기 위축으로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초기 스타트업 투자를 꺼리는 건 ‘시장 생리’상 당연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업계 관계자는 “후발 주자로서 독특한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하는 초기 스타트업은 대부분 투자 수익이 좋지 않고 어쩌다 대박 나는 경우가 있을 뿐”이라며 “투자자로선 일종의 도박인데, 수익성만 따진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초기 스타트업 투자는 하지 않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공공재’적 성격을 띠는 초기 스타트업 피해가 유독 극심하다는 점이다. 시드 투자 총 투자금액은 668억원으로, 2년 전 776억원보다도 적다. 균형을 잡아야 할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지난 3년간 정부 스타트업 지원의 무게 중심은 초기 스타트업에서 더 큰 스타트업으로 옮겨가고 있다. 한국벤처투자에 따르면 초기 스타트업 지원 목적으로 조성한 창업 초기 펀드, 청년창업 펀드, 개인투자조합 펀드가 전체 모태펀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4%, 32%, 26%로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이기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이사는 “민간에선 자발적으로 시드 투자가 일어나지 않는다”며 “정부가 초기 스타트업 생태계를 지키는 역할을 꾸준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로나19 상황 자체도 초기 스타트업 투자금 확보에 걸림돌이 됐다. 창업 초기 단계 특성상 ‘스킨십’이 투자금 유치에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로 데모데이가 줄줄이 취소되면서 이런 기회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데모데이는 투자자들에게 사업 아이템을 소개하는 자리다. 비대면 방식으로 데모데이가 열리기도 했지만, 직접 투자자를 만나 설득하는 것에 비해선 극명한 한계가 있었다는 게 업계의 하소연이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수십 번 직접 만나 설득해도 투자를 받을까 말까인데, 아예 만날 수조차 없다는 게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지 몰랐다”며 “자금 흐름이 이미 네트워크를 확보해 놓은 성장 단계 기업들로 쏠리고 있다”고 했다.
구민기/최한종 기자 ko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