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에 얽매이지 않을 정도로 독립적인 전력공급망을 구축했던 텍사스가 수십 년 만의 맹추위로 전례 없는 에너지난에 빠졌다. 사흘째 대규모 정전이 이어지고 270만 가구에 전기 공급이 완전히 끊겼다. 유정과 석유 정제시설, 가스 파이프라인, 풍력발전 터빈 등이 줄줄이 얼어붙은 탓이다. 전력 수급 체계가 견고해 ‘미국의 에너지 심장’으로 불리는 텍사스가 이번 사태로 자존심을 구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산유량의 41%를 차지하는 텍사스가 멈춰서면서 글로벌 원유시장 공급망도 타격을 받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최대 에너지난’ 놓고 책임 공방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17일(현지시간) 텍사스주에선 발전용량의 40%가 중단됐다. 극심한 한파로 발전원 여럿이 멈춰선 와중에 전력 수요가 폭증하자 송전망 과부하를 우려한 당국이 발전소 185곳의 전력 공급 중단을 결정해서다. 텍사스는 주민의 60%가 전기난방을 쓴다. 전력 복구 일정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텍사스는 한파가 본격화된 지난 15일부터 전력 도매가격이 ㎿h당 9000달러를 웃돌았다. 12일 대비 약 3500% 폭등한 가격이다. 천연가스 스폿(현물) 가격은 1주일 전 대비 약 100배 뛴 1000달러 선을 넘겼다.
이를 두고 텍사스 안팎에선 책임 공방이 가열되는 분위기다. 근본 원인은 기후 변화에 따른 이례적 한파지만, 텍사스만 다른 주에 비해 심각한 재난 사태를 겪고 있어서다. 먼저 도마에 오른 건 텍사스 송전망을 운영하는 전력신뢰도위원회(ERCOT)다. 그레그 애벗 텍사스주지사는 17일 ERCOT에 정전 사태의 책임이 있다며 조사를 명령했다. 텍사스주 의원들도 청문회 소집을 요구했다.
텍사스는 다른 주와 달리 독립적인 전력공급망 체계를 갖췄다. 미국 본토에선 세 곳뿐이다. 이 중 텍사스만 유일하게 다른 주와 송전망을 연계하지 않아 인근 주에서 전력을 들여올 수 없다. 미국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여서 연방 에너지 규칙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같은 체계를 고집했다.
무작정 친환경 에너지 의존도를 높인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텍사스의 평년 2월 최저 기온은 영상 5도지만 이번엔 일부 지역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졌다. 이 때문에 풍력발전기 터빈의 절반가량이 얼어붙어 가동이 중단됐다. 산유량도 급감…세계 시장 우려세계 에너지 시장도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텍사스는 미국 에너지산업의 심장부로 통한다. 이번 한파와 전력난으로 각종 정제시설과 유정 등이 ‘올스톱’됐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17일 미국 전체 산유량은 40% 급감했다. 가스 생산량도 2017년 이후 최저를 찍었다.
이날 브렌트유는 배럴당 64.34달러,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는 61.14달러로 모두 작년 1월 이후 최고가를 기록했다. 전 거래일 대비 약 1% 올랐다. 원유시장 주력 헤지펀드인 어게인캐피털의 존 킬더프 창립자는 “원유 공급이 끊겼지만 정제시설도 멈춰선 상태라 당장은 타격이 표면화하지 않고 있다”며 “앞으로 영향이 더 뚜렷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생산량 회복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블룸버그통신은 “한번 얼어버린 유정을 다시 가동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라며 “자연 해빙을 기다렸다가 각종 설비를 점검해야 해 복구에 최소 몇 주가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때문에 석유제품 생산이 늦어지면 제조기업 생산과 농산물 유통 등에도 연쇄 타격이 갈 수 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