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재·보선 선거 전에 전국민 재난지원금을 한번 더 지급하자는 집권 여당 주장에 대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버티기'가 계속되고 있다. 버티는 강도는 그 어느 때보다 세다. 홍 부총리는 지난 2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차 재난지원금은 전국민 보편 지원과 소상공인 등 소상공인 지원을 동시에 해야 한다"고 말하자 불과 4시간 뒤 "정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대했다.
지난 6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도 여당 의원의 집중 공세에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왜 재정을 적극 쓰지 않느냐"는 지적엔 "위기 시 재정이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실천해왔다"고 받아쳤다. "다른 나라 정부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지원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에는 "한국의 코로나19 지원 규모는 주요 20개국(G20) 중 10위"라는 통계로 반박했다.
최인호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9일 "선별·보편지급을 함께 추진할 것"이라며 대규모 나랏돈 풀기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그러자 홍 부총리는 이튿날 "추가 지원금은 '더 두터운 지원, 사각지대 보강지원'을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선별 지원 입장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나랏빚 증가속도 너무 빨라 문제"홍 부총리가 여당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재정건전성 훼손 우려에 있다. 여당의 4차 재난지원금 지급 방안엔 최소 20조원 이상의 예산이 소요된다. 지난 5월 1차 전국민 재난지원금에 14조3000억원이 들었고, 소상공인 위주 2~3차 재난지원금엔 8조~9조원이 투입됐기 때문이다. 이 돈을 조달하려면 대부분 적자국채를 찍는 수밖에 없다. 이는 나랏빚 급증으로 이어진다.
올해말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47.8%로 예상된다. 하지만 20조원 적자국채를 추가로 발행하면 48.8%로 뛴다. 만약 재난지원금 규모가 30조원으로 커지면 49.3%다. 여당은 그래도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이 다른 나라보다 많이 낮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 일본 등 주요국은 국가채무비율이 100%를 훌쩍 넘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홍 부총리는 채무비율 증가 속도를 경계하고 있다. 국제신용평가사는 국가신용등급을 매길 때 국가채무 규모 못지 않게 증가 속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호주는 작년 정부부채비율(국가채무+비영리공공기관 부채의 GDP 비중)이 60.4%로 비교적 낮았는데도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로부터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당했다. 2019년 46.3%에서 너무 빨리 늘었다는 이유 등에서다.
만약 30조원 재난지원금이 현실이 돼 올해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이 49.3%가 되면 작년(44.2%) 대비 약 5%포인트, 2019년(37.7%)과 비교해선 약 12%포인트가 뛰게 된다. 이 정도 속도면 국가신용등급 하락 등 사태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는 게 재정 당국의 판단이다.
6일 대정부질문에서 홍 부총리가 다음과 같이 한 말이 기재부의 우려를 잘 집약하고 있다. "2019년에 국가채무비율이 40%를 넘느냐 마느냐 갖고 나라가 들썩일 정도로 논란이 일었다. 그런데 채무비율이 내년엔 50%를 넘고 3년 뒤엔 60%에 육박한다. 단순히 현재 수준이 낮다는 것만 갖고 말할 수 없고 올라가는 속도와 그에 따른 국가신용도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재부 관계자는 "국가신용도 하락이 현실이 되면 한국과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 국가엔 치명적"이라며 "국채 금리와 기업의 자본 투자 금리가 오르는 것은 물론 외국인 투자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누구보다 이런 문제를 잘 아는 부총리가 추가로 대규모 재정을 풀자는 주장에 강하게 버티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코로나 방역에도 부정적"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은 온 국민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코로나19 방역에도 부정적이란 점이 홍 부총리가 여당에 맞서는 또다른 이유다. 기재부 관계자는 "코로나19에 피해가 없는 고소득 직장인, 공무원 등까지 지원금을 준다면 이는 피해 지원이 아니라 경기 부양 목적에 가깝다"며 "이런 정책은 국민의 소비 심리를 자극하고 외부 활동을 늘려 방역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현재 한국 경제의 최우선 과제는 코로나19 확산세 잡기다. 방역이 안정되지 않고서는 경제 회복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정부가 코로나19 확진자가 다소 줄어 방역 조치를 완화할 때마다 2, 3차 유행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소상공인 자영업자 피해는 되레 커졌고 경제 회복도 그만큼 늦춰졌다. 코로나19 3차 유행을 가라앉히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서 전국민 재난지원금을 주는 건 '엇박자' 정책이자 '소탐대실'이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이낙연 대표 역시 한달 전만 해도 이런 생각에 동조했다. 그는 지난달 19일 이재명 경기지사가 전국민 재난지원금을 주장하자 "사회적 거리두기 중인데 소비하라고 말하는 것이 마치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달 들어선 180도 입장을 바꿨다. 보편·선별 동시 지원을 가열차게 추진하고 있다. 4월 선거 표심 잡기에 본인의 소신을 저버렸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국민 재난지원금이 막대한 재정 투입 대비 효과가 불확실한 점도 재정 당국이 신중론을 펴는 이유다. 1차 전국민 재난지원금은 작년 5월 중순부터 지급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표적인 소비 지표인 소매판매액지수는 6월에만 6.4% 늘었을뿐 7월(0.5%), 8월(0.3%)엔 다시 침체됐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작년 12월 "1차 재난지원금의 소비 진작 효과는 전체 14조3000억원 중 30%인 4조원 수준에 그쳤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나머지 70%는 원래 본인 소득으로 소비했을 부분을 지원금으로 대체하거나 저축에 쓰였다는 것이다. 보고서엔 코로나19 피해가 컸던 여행업·대면서비스업 등은 지원 효과가 미미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청와대도 부총리에 힘 실어줘 홍 부총리가 여당에 강하게 맞서는 이유엔 이 같은 '논리' 외에 다른 요소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청와대의 지지'가 그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홍 부총리와 여당 간 힘겨루기가 한창인 지난 8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정부는 재정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과감하게, 실기하지 않고, 충분한 위기 극복 방안을 강구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최종적인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고 말했다. '재정을 과감하게 풀되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한다'는 얘기는 홍 부총리의 평소 주장과 일치한다. 문 대통령은 이날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경제위기에 적극적으로 효과적으로 대처했다"고도 했다. "대통령이 여당보다 홍 부총리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 이유다.
경제부처의 한 관계자는 "최근 들어 선거를 겨냥한 여당의 지나친 재정 확대 드라이브에 청와대도 부담스러워한다는 얘기가 많다"며 "홍 부총리가 강한 어조로 여당을 반박할 수 있었던 것도 청와대와의 교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청와대의 지지와 홍 부총리의 버티기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단 청와대 입장에선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이 공론화된 상태에서 이를 없었던 일로 하는 건 정치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보편 지원으로 갈지, 선별 지원으로 갈지 명확하게 가르마를 타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반면 여당은 보편 지원을 포함한 나랏돈 퍼붓기를 포기할 기미가 안 보인다.
지금까지 전례를 봐도 홍 부총리는 여당과 이견을 보였던 대부분 사안에서 결국엔 백기 투항했다. 1차 전국민 재난지원금과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범위 확대 등이 대표적이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사안에 따라 정부 판단이 맞을 수도 있고 정치권 주장이 맞을 수도 있지만 4차 재난지원금의 경우 재정 당국 의견이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재정건전성과 코로나19 방역, 정책의 실효성 등 모든 측면에서 피해 계층 위주로 두텁게 지원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선거가 다가올수록 포퓰리즘적인 주장이 더 커질텐데 대통령이 늦지 않게 합리적 방향으로 결론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