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의 탈(脫)탄소 정책에 코로나19 이후 경기 회복 기대감까지 선행 반영되면서 구리, 니켈, 코발트 등 주요 원자재 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올 들어 글로벌 시장에서 인플레이션 우려가 나오는 것도 원자재 가격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월가에서는 이 같은 원자재 랠리가 더 지속될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일각에선 10년 구조적 상승장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진단도 나왔다. 유가 1년 만에 최고치…코발트·니켈도↑
지난 4일 구리, 원유, 대두(콩) 등 주요 22개 원자재 선물로 구성된 블룸버그 상품지수가 81.9를 기록했다. 이는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 고점인 작년 1월 81.6을 넘어선 것이다. 지난해 3월 저점과 비교하면 40%가량 올랐다.
대표적 경기민감 원자재인 구리 가격은 올 들어 현물 기준 t당 8000달러 안팎을 오가며 지난해 3월 저점 대비 70% 넘게 상승했다. 구리 가격이 t당 8000달러를 넘긴 것은 8년 만이다.
친환경 전기차가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테마로 관심을 받으면서 배터리 소재인 코발트와 니켈 가격도 뛰고 있다. 올 들어 코발트 가격은 34% 이상, 니켈 가격은 6% 넘게 올랐다. 앞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전기차 관련 세제 혜택을 늘리고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차량 300만 대를 모두 전기차로 바꾸겠다고 했다. 중국도 2035년부터 내연기관 차를 퇴출시키겠다는 방침이다.
산업금속뿐 아니라 2012년 이후 가격이 계속 떨어지던 옥수수, 콩 등 곡물 가격도 랠리 중이다. 지난 6개월간 40~50% 뛰었다. 남미, 러시아 등 주요 곡창지대의 이상기후 현상에 중국이 농산물을 대거 수입하면서 가격이 급등했다. 코로나19로 물류 체계가 타격을 받은 것도 가격을 밀어올렸다.
국제 유가는 코로나19 이전 가격을 회복해 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5일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원유(WTI) 3월물은 배럴당 56.85달러에 거래됐다. 작년 1월 말 이후 최고치다. 영국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선 북해산 브렌트유가 배럴당 58.46달러에 거래됐다. 지난해 2월 19일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수요 회복은 여전히 불안정한 분위기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이 감산 지속 의지를 밝힌 영향이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도 원유 재고가 예상보다 크게 줄고 있다고 발표했다. 인플레 우려·친환경 정책 영향원자재 가격이 오르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강송철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백신 보급과 경기 회복 기대, 중국 제조업에 대한 낙관적 전망, 블루웨이브 현실화 등 원자재 가격이 오르기 좋은 환경”이라며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가 코로나19 이후 처음 연 1%를 웃돌며 인플레이션 압력도 커졌다”고 설명했다.
달러화 약세로 글로벌 자금이 위험자산 선호 현상을 보이고 있고, 미국에선 바이든 행정부의 인프라 투자 확대 기대가 커지면서 원자재로 자금이 쏠리고 있다. 원자재는 주로 달러화로 거래하기 때문에 약달러 역시 원자재 값을 밀어올리는 요소다. 저금리 지속으로 인플레이션 우려가 나오면서 헤지 수단으로서 원자재 투자 가치도 커지고 있다.
주요국 정부가 추진하는 친환경 정책도 원자재 가격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크리스 미드젤리 S&P 글로벌 수석애널리스트는 “친환경 인프라 조성을 위한 수요 증가로 구리와 니켈, 코발트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마크 루이스 BNP파리바자산운용 지속가능전략부문 수석애널리스트는 “지난 30년간 이 시장을 지켜봐왔지만 이런 열기를 보지 못했다”며 “향후 30년간 친환경 전환을 위한 모든 분야 투자에 슈퍼 사이클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골드만삭스도 2000년대 초반부터 10년간 이어졌던 원자재 랠리가 다시 돌아왔다며 ‘슈퍼 사이클’에 진입했다는 주장을 내놨다. 제프 커리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상승장에 진입했다”며 “이런 강세장이 향후 10년간 가격을 지지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