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 3위 경제국인 이탈리아에 새해 벽두부터 정국 위기가 닥쳤다. 가시밭길을 걸으며 간신히 지탱해온 연립정부(연정)가 1년4개월 만에 붕괴한 데다 재결합 노력마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이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에게 “차기 내각을 구성해 달라”고 요청하며 구원투수로 등판시켜 일단 급한 불을 껐다.
상·하원 동의를 거쳐 ‘드라기 내각’이 성공적으로 출범하면 이탈리아의 69번째 정부가 된다. 1946년 이탈리아 공화국 수립 이후 75년간 무려 68개의 정부를 거쳤고 총리는 29번 교체됐다. 정부의 평균 존속 기간은 13개월에 불과하다. 고질적인 정치 병폐가 경제와 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후예’ 이탈리아의 정치 불안은 어쩌다 이렇게 극심해진 걸까. 연정 흔드는 소수당
2019년 9월 출범한 연정은 반체제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운동과 중도좌파 성향의 민주당, 중도 정당인 ‘생동하는 이탈리아’로 구성됐다. 파열음이 난 건 지난달 13일 생동하는 이탈리아의 실권자이자 전 총리였던 마테오 렌치 대표가 “주세페 콘테 총리는 위기관리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돌연 연정 이탈을 선언하면서다. 과거 무명 변호사였지만 연정을 이끌어갈 총리로 지명돼 급부상한 콘테 총리는 현재 60%의 지지율을 받는 스타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2019년 창당한 소수당 생동하는 이탈리아의 지지율은 줄곧 3%를 밑돌았다.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하자 렌치 대표는 승부수를 던졌다. 향후 정치적 경쟁자가 될 게 분명한 콘테 총리를 내보낸 뒤 새 연정 구성 협상에서 몸값을 높여보겠다는 포석도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생동하는 이탈리아는 이번 연정에서 규모가 가장 작고 소수 정당에 불과하지만 꼬리가 몸통을 흔든 셈이라고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지적했다. 손발이 맞지 않으면 일단 정부를 무너뜨리고 보는 게 연정 구성 정당의 반복된 행태다.
마타렐라 대통령은 기존 연정이 다시 뭉칠 여지가 있다며 세 당에 나흘간 시간을 줬다. 하지만 이들은 코로나19 사태 대응과 내각 장관직 배분 등에 대한 협의에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고 연정은 끝내 깨졌다. 총리직 사퇴라는 강수를 둔 콘테 총리의 정치적 생명도 사실상 끝났다. 콘테 총리의 사임은 2018년 6월 취임 이후 두 번째다. 2019년 8월 극우정당 동맹이 오성운동과의 연정을 파탄내며 정국 위기를 몰고 왔을 당시와 닮은 모습이다. 역사적인 다당제 구조의 폐해위기가 수습돼 69번째 정부가 들어서도 또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적했다. 이탈리아의 정치 불안은 왜 유독 심각할까. 과도한 다당제 시스템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이탈리아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나뉜다. 정당 및 정치 그룹은 합종연횡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고, 정당 수로만 따져도 상·하원 모두 10개가 훌쩍 넘는다.
정당이 난립하다 보니 한 개 정당이 의회 과반을 점하기 쉽지 않다. 결국 2~3개 정당이 연합해 정부를 구성해야 했고, 공화국 수립 이후 연정은 줄곧 반복돼 왔다. 하지만 이념적 지향과 지지 기반 등이 다른 복수의 정당이 연정을 구성하면 내분과 갈등으로 오래 가기 어렵다. 콘테 총리가 이끄는 두 개의 정부도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다당제 구조는 역사와도 관련 있다. 고대 로마제국의 터전인 이탈리아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통일국가가 수립된 것은 200년이 채 안 된다. 그전엔 지역 국가들로 쪼개져 자생했다. 이는 이탈리아가 지역별 고유한 문화를 보유한 원천이 됐지만 정치적으로는 지역 단위 정당이 난립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남북 등 지역 문제까지 더해져 정치 구조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다당제는 1990년대부터 더 심해졌다. 그 전에는 중도 정당인 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 공산당 두 축을 중심으로 소수 정당이 이해관계에 따라 합종연횡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공산당이 몰락하고 기독교민주당은 부정부패 수사로 와해됐다. 공산당은 좌파 정당 여러 개로 쪼개졌고 우파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전진이탈리아를 창당하는 등 수많은 정당이 등장했다. 지역별 투표 성향이 반영된 2018년 총선에선 원내 1, 2당이 연정을 구성했으나 1년2개월 만에 깨졌다. 정당들 ‘동상이몽’ 속 내각 구성정부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부재한 것도 정국 위기가 반복되는 이유다. 독일과 스페인 등 유럽의 다른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위기 시 차기 정부를 맡을 정치세력에 대한 의회 과반의 동의가 있어야 정부 교체가 가능하다. 정부가 너무 자주 바뀌는 것을 막고 정책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이런 장치가 없다.
혼란스러운 건 정치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유럽에서 가장 먼저 코로나19 타격을 받은 이탈리아는 전국적인 고강도 봉쇄가 이어지며 요식업, 숙박업 등을 포함한 관광산업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국내총생산(GDP)의 13%를 차지하는 관광산업이 무너지며 국가 경제의 뒷걸음질도 가속화했다. 누적 사망자가 9만 명을 넘는 등 코로나19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다.
방역에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비상시국에 또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이자 국민 여론도 “무책임하다” “국민 생명을 담보로 한 권력 놀음”이라며 싸늘하다. 우여곡절 끝에 드라기 전 총재가 등판했지만 앞날은 여전히 험난하다. 4일(현지시간)부터 의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정당별 협의에 착수하는 등 본격적인 내각 구성 작업을 시작했지만 드라기 전 총재가 소속 정당이 없는 전문 관료인 데다 각 정당의 이해관계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과반을 쉽게 확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민주당 및 생동하는 이탈리아의 지지 속에서 최대 정당인 오성운동이 변수로 꼽힌다.
FT는 “드라기 전 총재는 과거 유럽 경제의 소방수 역할을 한 것처럼 코로나19로 큰 충격을 받은 이탈리아의 경제 위기 극복이라는 중차대한 책무를 맡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럽연합(EU)이 이탈리아에 제공하기로 한 2090억유로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도 당면한 정책 과제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