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호 농심그룹 회장(92)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자본금 500만원으로 농심을 창업한 지 56년 만이다. 농심은 4일 이사회를 열고 다음 달 25일 열리는 정기주주총회에서 신 회장을 사내이사로 재선임하지 않기로 했다. 신 회장의 임기는 다음 달 16일까지다. 농심의 이번 주주총회에는 신 회장의 장남인 신동원 부회장과 박준 부회장, 이영진 부사장을 사내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이 상정된다. 현재 신동원 부회장과 박준 부회장은 각자 대표이사를 맡으며 농심을 이끌고 있다.
신 회장은 92세의 고령 경영인이지만 최근까지도 회사 현안을 직접 챙겨왔다. 지난해 농심이 사상 최대 실적을 내며 국내외 주력 사업이 모두 안정적인 상승 궤도에 오른 것이 퇴임의 결정적인 배경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85년 국내 라면시장 1위에 오른 농심은 신라면을 내세워 세계 무대에서 ‘K푸드’의 대명사가 됐다. '뚝심 경영'이 이룬 라면왕국
농심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보다 12.6% 증가한 2조6398억원, 영업이익은 103.4% 증가한 1603억원이었다. 해외 매출은 사상 처음으로 1조원을 넘어섰다. 국내외 주력 사업인 라면 매출 증가가 실적을 견인했다. 미국 제 2공장을 건설 중인 농심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를 거치며 미국과 중국, 유럽 등 주요 시장에서 인지도가 높아진 만큼 올해 중남미 등 다른 시장도 적극 개척해 현재 40%대인 해외 매출을 50%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신 회장은 반세기 경영 원칙은 '우보만리'로 요약된다. 1965년 롯데라면을 처음 개발한 이후 지금까지 '식품업의 본질은 맛과 품질'이라는 원칙을 지켜왔다. 화려한 광고와 마케팅보다 제품 본질의 품질 경쟁력을 갖춰야 100년 기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지금의 농심을 만든 장수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고기라면, 너구리, 육개장사발면, 짜파게티, 신라면, 안성탕면 등 라면 제품과 새우깡, 감자깡, 양파링, 꿀꽈배기 등 스낵 제품이 당시 20년 간 출시된 스테디셀러들이다. 신 회장은 사내에서 '작명왕'이라고 불릴 만큼 농심의 모든 제품명을 직접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식품업의 '본질' 고집한 56년
고(故)신격호 명예회장의 동생인 신 회장은 일본롯데 이사로 재직하다 형의 만류를 무릅쓰고 롯데공업을 차린 인물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학업과 장사를 병행했다. 부산 국제시장과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유통기한이 지난 쌀을 싸게 팔려다 실패도 했다. 그런 경험이 평생 품질 경영을 하게 된 배경이 됐다.
농심을 1등 기업으로 키운 건 투자와 기술 개발이다. 1965년 첫 라면을 생산한 해에 라면연구소를 세웠다. 서울 대방공장을 모태로 안양공장, 부산 사상공장, 구미공장 등을 첨단 식품 생산기지로 만들었고 해외 중점 국가인 미국, 중국에도 대규모 공장을 지으며 진출했다.
기술이 곧 품질이고 혁신이라고 믿어온 신 회장은 2010년부터 직원들에게 "식품도 명품만 팔리는 시대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는 또 "라면 업계 지난 50년이 스프 경쟁이었다면 앞으로 50년은 제면 기술이 좌우할 것"이라며 "다른 것은 몰라도 경쟁사와의 연구개발(R&D) 역량 경쟁에서 절대 뒤지지 말라"고 강조했다. 굵은 면발 열풍을 일으킨 짜왕과 맛짬뽕(2015), 신라면의 제 2전성기를 이끈 신라면건면(2019) 등 혁신 제품들은 이 같은 전략의 결과물이었다. 당시 연구원들이 원가를 낮추기 위해 굵은 면에 일부 들어가는 쌀가루를 5년 묵은 통일미를 사용하다가 신 회장으로부터 "품질은 좋은 원재료에서 나온다. 프로젝트를 전면 재검토하라"는 불호령을 듣기도 했다.
라면 외 사업군에서도 식품업의 본질에 투자해 성공을 거둔 사례가 많다. 농심의 제품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붙는다. 트럭 80대 분량의 밀가루로 수천 번 실패하다 제조해 낸 국내 최초의 스낵 새우깡, 국내 최초의 쌀면과 건면 특허 기술, 국내 최초의 짜장라면 등이 수많은 도전 끝에 만들어진 결과다. 글로벌 기업 체력 만들고 떠나다 농심은 눈앞의 변화만 좇기보다 멀리 보고 기술과 인프라를 준비하는 기업문화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생산시설도 미래 수요까지 감안해 미리 준비했다. 해외 진출도 마찬가지다.
신 회장은 1980년대부터 “세계 어디를 가도 신라면을 보이게 하라”고 말하며 수출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 때문에 국내 식품회사 중 가장 먼저, 가장 공격적으로 해외에 진출했다. 라면을 처음 수출한 것은 1971년. 창업 6년 만이었다. 농심의 눈은 이후 늘 세계 무대를 향했다. 남극의 길목부터 알프스 최고봉에서까지 ‘신라면’을 팔고 있다.
1981년 일본 도쿄에 현지 사무소를 개설했고, 1996년에는 중국 상하이에 첫 해외 공장을 세웠다. 중국 공장을 3개까지 늘린 뒤 2005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공장을 지었다. 현재 90% 이상 가동되고 있는 미국 제1공장으로는 물량이 부족해 올해 완공을 목표로 서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제2공장을 짓고 있다. 호주, 베트남에도 법인을 설립하는 등 농심은 세계 100여 개국에 라면을 수출하고 있다. 하늘 위와 땅끝까지 농심은 ‘실핏줄 전략’으로 신라면을 팔았다. 스위스 최고봉 몽블랑의 등산로와 융프라우 정상 전망대, 남아메리카 칠레 최남단 마젤란해협 근처의 푼타아레나스, 스위스 마터호른과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매점, 이탈리아 로마의 유엔식량농업기구 본부 면세점까지 진출했다.
해외에서의 성과는 느리지만 견고하게 ‘초격차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농심의 라면 수출액은 2004년 1억달러를 넘었고, 2015년엔 5억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 농심은 전체 매출의 약 40%인 1조1000억원을 미국과 중국 등 해외에서 달성했다. 농심의 올해 해외 매출 목표는 전년보다 15% 이상 높여 잡았다.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뿌리에는 국내 농가와의 상생도 자리잡고 있다. 신 회장이 롯데그룹에서 완전 분리해 1978년 사명을 '농심'으로 바꾸며 제 2의 창업을 하며서 "먹거리의 기본인 농산물을 만든다는 마음이 담았다"고 했다. 농심이 지금도 과자와 라면 제품 등에 국내산 아카시아 꿀, 완도산 다시마, 국내산 감자 등을 적극 고집하고 있는 이유다.
신 회장은 미디어 노출을 극도로 꺼린 은둔형 경영자이기도 했다. 기업가는 화려한 포장과 이미지보다 비즈니스 자체로 평가 받아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해왔다. 신 회장은 2003년 농심을 인적 분할해 지주회사 ‘농심홀딩스’를 신설했다. 현재 상장, 비상장, 해외법인 계열사 총 35개사를 산하에 두고 있다. 국내 계열사는 19개다. 상장사는 농심홀딩스, 농심, 율촌화학 등 3곳이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