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시인이었던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분노'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웅 아킬레스의 '분노'가 트로이 전쟁의 향방을 바꾼 것으로 그려집니다. 고대 중국으로 눈을 돌려보면《열국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오자서(伍子胥)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초나라 평왕의 묘를 파헤친 뒤 왕의 시체에 300번이나 채찍질을 합니다. 가히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분노의 화신'이라고 할 법합니다.
이처럼 '분노'는 고대 동서양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던 감정이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영웅의 '분노'가 사회의 큰 흐름을 바꾼 것처럼 기술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근대 이후로는 분노와 같은 개인의 감정은 냉정하고 차가운 이성에 자리를 비켜주게 됩니다. '분노'가 차지하던 자리엔 합리적 판단과 이성, 계산이 들어섰습니다. 당연히 냉정한 이성은 분노 같은 억제되지 않은 감정보다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분노'는 가능하면 감추고 가두어야 할 대상이며,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나 가끔 분출이 허용되는 존재가 됐습니다.
그랬던 '분노'가 합리적 계산이 총 집결된, 자본주의 총본산인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전면에 나서는 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디오게임 소매업체인 게임스톱 주식을 놓고 똘똘 뭉친 미국 개인투자자(미국 불개미)들이 공매도 전문 대형 헤지펀드들을 코너로 몰아넣는데 '개미들의 분노'가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분노한 '미국 불개미'들은 공매도와의 전쟁을 이어가고 있고, 은과 같은 원자재 시장도 들썩이게 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기존의 공고했던 판을 뒤집어 버리는 듯한 모습입니다.
SNS를 매개로 모인 수백만 명의 개미를 결집시켰던 '분노'는 기득권의 상징, 기울어진 운동장의 대표가 된 월가를 향했습니다. 금융 시스템이 개인투자자들보다 기관들에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인식이 전면적으로 부각됐습니다. 특히 큰돈을 벌면서 위험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 존재,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부른 장본인으로 평범한 미국인에게 큰 고통을 안겼지만, 본인들은 거액의 보너스로 초호화 생활을 하는 기득권 세력에 대한 격한 감정이 거침없이 분출됐습니다.
여기에 '불개미'의 주축을 이루는 젊은 세대들은 누릴 것을 다 누린 것으로 보이는 기성세대들로 분노의 화살을 돌렸습니다. SNS로 단체행동에 나선 '미국 불개미'들은 베이비붐 세대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에 대한 적대감을 감추지 않습니다. 주식토론방 월스트리트베츠에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 10대 초반이었지만 월가가 삶에 미친 충격은 생생히 기억한다"거나 "기성세대는 고등학생 시절 여름 아르바이트만으로 자동차를 사는 등 '황금기'를 누렸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등의 윗세대에 대한 박탈감과 적의를 표현한 글이 많다고 합니다.
아무리 발버둥 처도, 아무리 노력해도 윗세대처럼 부를 일구는 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긴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 전반에 대한 '분노'를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기성세대가 경제를 잘못 이끌었다고 여기는 젊은 투자자들의 분노가 게임스톱 사태에 불을 붙였다"고 짚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발산된 '분노', 분출된 '분노'를 어떻게 제어할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 게임스톱에서 공매도 헤지펀드를 '혼내 준'이후 미국 불개미들이 더욱 기세를 올리는 듯하지만 주가를 수십 배씩 끌어올린 그들의 행위가 합리적이라고 보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저 미운 놈, 눈 밖에 난 놈을 혼내줬다는 것일 뿐이지 기업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통해 기대 이익과 손실을 따져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이익이나 미래 성장성과 괴리돼 따로 논 주가는 반드시 제자리를 찾아갔다는 게 지금까지 주식시장에 적용됐던 철칙이기도 합니다.
'불개미의 분노'가 모든 것을 누리고 거머쥔 기성세대가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공정하게 바꾸는 계기가 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선에서 '소프트 랜딩'을 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분노'는 거침없지만, 영원히 지속하지 않고, 무엇보다 '분노'가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창출해 내는 데는 힘에 부치는 감정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킬레스도 오자서도 '분노'만을 분출한 끝이 '비극'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김동욱 논설위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