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중국과 일본은 제국주의 팽창 경쟁을 펼치던 서구 열강에 의해 강제 개항됐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외세에 바로 문호를 연 것은 아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서양 선박은 끊임없이 중국과 일본 해안에 나타나 측량, 정찰을 진행했고 간헐적으로 통상을 요구했다. 대표적으로 1792년 영국 왕 조지 3세가 청 건륭제의 82세 생일에 맞춰 사신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건륭제는 “당신들이 들고 온 이상하고 기발한 물건들이 중요해 보이지 않고, 당신네 생산품이 필요하지도 않소”라는 답신과 함께 사신을 추방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영국은 청 관리의 아편 단속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키고 마침내 1842년 난징조약으로 상하이와 광저우를 개항시켰다. 청나라의 취약함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억눌린 하층민 봉기가 일어났는데, 홍슈취안(洪秀全)이 기독교 교리를 모방해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이 대표적이다. 논밭을 만인에게 나눠 주고 공동 경작하며 함께 나눈다는 개혁사상은 들불처럼 중국을 휩쓸었다. 하지만 지도층이 천왕(天王)을 칭하며 중화사상의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고, 서구열강의 본질과 중국의 현실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실패로 막을 내렸다.
일본도 1854년 페리 제독이 이끄는 구로후네(黑船)에 의해 개항됐다. 도쿠가와 막부의 무능함에 실망한 무사들이 존왕양이 운동을 일으킨 가운데, 하급 무사 한 명이 구로후네에 올라 자신을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는 사건이 있었다. 시커먼 배를 동아시아까지 끌고 와서 교역을 요청하는 서양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물론 그는 추방돼 막부에 의해 투옥됐다. 출옥 후 25세의 젊은 그는 또래를 모아 작은 사설 교육기관을 열어 서양문물을 학습하고 급진적 개혁안을 내놓는 활동을 전개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다.
이후 문하생 몇 명이 밀항에 성공해 런던에 머물면서 서양의 군사적 팽창 뒤에 산업혁명과 경제 발달이 있음을 깨닫는다. 귀국 후 폭력적 양이운동이 아니라 제도와 경제개혁 없이는 청나라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정확히 인식하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된다. 우리에게는 국권침탈의 원흉이지만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다.
역사의 흐름을 우연한 사건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단순화의 우를 범하기 쉽다. 그러나 개항을 둘러싼 두 나라 국민의 상이한 대응 사례는 신냉전과 자국중심주의 부활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한국민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신승리와 자아도취는 쉽고 달콤하다. 그러나 냉철한 현실 인식과 근본에 대한 탐구정신, 수용하고 도전하는 용기(勇氣)가 문제해결과 성공의 원동력이다. 국가가 아니라 국민이 정신 차려야 한다. 나라가 잘못되면 가장 고통받는 게 국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