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붉은 여왕과 개미의 질주

입력 2021-01-31 18:38
수정 2021-02-01 00:15
“여기선 같은 곳에 있으려면 쉬지 않고 달려야 해. 다른 데로 가고 싶으면 적어도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 하지.”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은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신기한 세상을 묘사했다. 앨리스가 붉은 여왕(레드 퀸)을 만난 곳에선 주위 풍경도 함께 움직인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뒤처지는 세상.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을 의미하는 ‘붉은 여왕 효과’다.

요즘 글로벌 증시를 지켜보면 개인 투자자들의 질주 속도가 대단하다. 최근 미국 개미들이 게임스톱 주가를 단기간에 끌어올려 공매도 헤지펀드를 무릎 꿇린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기관투자가 쫓아가기에 급급했던 개인들이 이제는 더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이다. 부쩍 커진 개인투자자의 힘SNS로 실시간 소통하며 무리 지어 달리는 이들의 전략은 시장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존 보글이 인덱스펀드를 개발해 개인이 낮은 비용으로 주식시장에 참여하는 시장 민주화의 길을 연 지 약 50년 만에 벌어진 최대 사건’(월스트리트저널)이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국내 주식시장도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개미 앞에 다양한 수식어가 붙은 적이 있었던가 싶다. 외국인과 기관에 맞서는 당당한 매매 주체로 자리 잡았다.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점은 개미들의 수준이 껑충 올랐다는 것이다. 온라인 주식 게시판에 들어가보면 프로 뺨치는 수준으로 기업을 분석하는 개인투자자가 많다. 주식 투자 서적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재테크 유튜브가 인기를 끄는 만큼 개미들의 주식 IQ도 함께 올라가고 있다.

투자 고수들을 만나보면 때로는 ‘스마트’ 개미가 유리하겠다 싶을 때도 있다. 스타 펀드매니저 출신인 한 공제회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작년 3월 급락장이 왔을 때 주식을 더 담고 싶었지만 내부 위험관리 규정에 막혀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자산운용사나 연기금 같은 기관은 VaR(발생가능한 최대손실액)을 비롯한 각종 위험관리 지표를 철저하게 따라야 한다. 30년 경력의 주식 전문가가 볼 때 저가 매수 기회가 왔다 싶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개미가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얘기다. 손실을 보더라도 빌린 돈만 아니면 길게 버티기는 개인이 더 쉽다. 장기·분산투자로 유도해야개미는 종목 선택도 자유롭다. 국민연금 투자운용팀장을 지낸 홍춘욱 EAR리서치 대표는 이렇게 설명한다. “남의 돈을 굴리는 펀드매니저는 종목을 선택한 구체적인 이유를 상사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윗선을 설득할 만한 확실한 근거가 없으면 포트폴리오에 담기가 어렵다. 자연히 누구나 아는 대형주로 쏠릴 수밖에 없다.”

물론 1년이 채 안 되는 상승장에서 수익을 좀 냈다고 개미들이 우쭐할 일도 아니다. 피터 린치의 말처럼 칵테일 파티에서 아마추어들이 펀드매니저에게 오를 종목을 찍어주는 지경이 되면 조정장이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최근 유튜브에서 조언한 대로 멀리 내다보고 혁신 기업에 분산투자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한 시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작년부터 시작된 개미들의 주식 열기가 한순간 바람으로 그쳐선 안 된다는 점이다. 부동산에 쏠려 있던 가계자산이 금융상품, 특히 투자상품으로 본격 이동하는 신호탄이 울렸기 때문이다. 장기투자로 유도하는 투자자 교육, 개인에게 불리한 공매도와 같은 제도 정비 등 투자 인프라 조성에 금융당국이 앞장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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