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용품 제조업계에서 한국은 변방이다. 타이틀리스트, 핑, 브리지스톤 등 미국과 일본 기업들이 세계 용품 시장을 양분한 가운데 한국 기업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해왔다. 이 같은 미국·일본 기업들의 철옹성을 흔들기 위한 국내 기업들의 도전이 성과를 내고 있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 국산 샤프트를 장착한 선수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최경주, 직접 개발한 샤프트로 호성적‘탱크’ 최경주(51)는 29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라호야의 토리파인스GC 북코스(파72·7765야드)에서 열린 PGA투어 파머스인슈어런스오픈(총상금 750만달러) 1라운드에서 6언더파 66타의 맹타를 휘둘렀다. 보기 없이 버디 6개를 골라내는 무결점 플레이로 공동 선두 패트릭 리드(30·미국), 알렉스 노렌(38·스웨덴)에 2타 뒤진 공동 4위에 올랐다. 최경주는 “탄도 높은 샷과 페이드샷이 잘되고 있다”며 “멀리 치고, 퍼트도 잘하고, 쇼트게임도 좋은 젊은 선수들과 겨루는 게 어렵지만 그들과 경쟁하는 게 행복하다”고 말했다.
최경주는 지난해 부진을 면치 못했다. 50대에 접어들며 챔피언스(시니어)투어와 정규투어 출전을 병행했지만 예선 탈락은 일상이 됐다. 지난 시즌 아홉 번 정규투어에 나섰지만 본선 진출은 세 차례에 그쳤다. PGA투어 통산 8회 우승이라는 그의 빛나는 업적은 과거의 영광으로 묻히는 듯했다.
최경주는 안주하지 않았다. 스윙 빼고 모든 것을 바꿨다. 클럽을 핑에서 스릭슨으로 바꾼 그는 자신에게 맞는 샤프트 제작에 직접 나섰다. 지난해 그가 찾은 곳은 국내 샤프트 업체인 델타인더스트리. 최경주는 전성기보다 느려진 스윙스피드를 고려한 맞춤형 샤프트를 개발하기 위해 기획·설계·생산 등 전 과정에 참여했다.
최경주는 “우주선에 사용되는 최첨단의 고탄성 원단을 접목한 ‘K shaft TANK by K J Choi’ 샤프트가 탄생했다”며 “일관성과 거리 메리트까지 갖춘 샤프트로 경기력 향상에 큰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노장 골퍼의 도전은 좋은 성적으로 이어졌다. 최경주는 올 들어 처음 출전한 소니오픈에서 사흘 내내 60대 타수를 쳤고, 두 번째인 이번 대회 첫날에는 그린을 단 세 번 놓치는 등 정교한 샷을 구사했다. 애덤 스콧도 K샤프트 행렬 동참한국산 샤프트의 매력에 빠진 것은 한국 선수뿐만이 아니다. PGA투어 통산 14승을 거둔 애덤 스콧(41·호주)은 이날 국내 기업 두미나가 지난해 개발한 오토플렉스(AutoFLEX) 샤프트를 들고 경기에 나섰다. 스콧은 이날 5언더파를 치며 공동 16위에 올랐다. 이 샤프트는 기존 샤프트보다 가볍고 낭창거리지만, 임팩트 순간에는 높은 경도를 발휘한다. 무게가 가벼워진 탓에 헤드스피드 빨라지고, 비거리도 늘어난다는 게 두미나 측의 설명이다.
해외 골프팬 사이에서 입소문을 탄 이 샤프트에 ‘러브콜’을 먼저 보낸 것은 스콧 측이었다. 타이틀리스트 클럽을 쓰는 스콧은 지난해 11월 열린 마스터스에 앞서 두미나 본사로 연락, 개당 800달러(약 90만원)짜리 오토플렉스 샤프트를 구입해 연습을 시작했다. 스콧의 샤프트는 ‘SF505xx’ 모델로, 무게는 57g이다. 스윙스피드가 빠른 투어 선수들이 사용하는 샤프트는 보통 70g대 이상이다.
정두나 두미나 대표는 “스콧이 안정적인 플레이를 해 만족한다”며 “한국 골프산업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