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8월, 한국경제신문 뉴욕특파원으로 부임한 직후 미국 연방정부 공보원(USIS)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월스트리트가 있는 세계 경제수도 뉴욕에 온 것을 환영한다. 미국 시장경제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도울 브리핑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부임한 각국 뉴욕 주재 외신기자들을 한데 모아 진행한 프로그램의 첫 번째 시간이 ‘쇼트셀링(short-selling·공매도) 이해하기’였다.
미국 시장경제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첫 번째 제도로 공매도를 꼽은 이유가 의아했는데, 명쾌한 강의가 궁금증을 풀어줬다. 강사는 쿠바 망명자 출신으로 공매도 전문회사를 운영하며 당시 뉴욕증시 상장기업들 사이에서 ‘악마의 전령사’라고까지 불리던 사람이었다. 뉴욕증시에 ‘IT(정보기술) 거품’이 일고 있던 당시, 그는 짧은 기간 동안에 가파르게 주가가 뛴 종목들을 정밀하게 분석하고는 공매도로 공략했다.
보유하고 있지 않은 주식을 빌려서 매각한 뒤 약정한 시기에 되갚는 공(空)매도는 당시 한국에선 낯선 투자기법이었다. 주가가 적정 수준에 비해 너무 많이 올랐다고 판단되는 주식이 공략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종목 상당수가 그의 손에 걸리는 족족 낭패를 봤으니 ‘악마’로 불릴 만도 했다. “공매도 대상 기업과 투자자들의 반발이 거세어 괴로울 때가 많다. 목숨 걸고 조국 쿠바를 탈출하던 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공매도를 개척하면서 겪는 어려움도 만만치 않다”던 말이 기억난다.
당시만 해도 ‘세계 자본시장의 심장부’ 뉴욕에서조차 공매도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그러나 운영을 거듭할수록 증시의 바닥을 다지고 이상과열을 막는 데 필요한 장치임이 입증됐다.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 중국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 국가가 주식 공매도를 허용하고 있는 이유다. 세계 증시의 대표 지수인 MSCI를 운영하는 모건스탠리는 각국 주식시장제도를 평가할 때 공매도가 허용돼 있느냐 여부를 중요한 잣대로 삼는다. 공매도의 순기능에 주목하는 정도를 넘어 ‘증시 건전성을 담보할 필수장치’로 보는 것이다.
이런 공매도를 놓고 한국이 요즘 소란스럽다. 코로나 사태로 주가가 폭락하던 작년 3월 일시 중지시킨 공매도를 재개하기로 한 시기가 다가오는데 “계속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공매도가 재개되면 모처럼 되살아난 증시에 찬물을 끼얹을 게 뻔하며, 외국인과 기관투자가만 공매도에 필요한 대차(貸借)시장을 쉽게 이용할 수 있어 불공정하기까지 하다는 이유에서다. 대형 투자자들이 미공개 정보를 이용하고 시세를 조종하는 데 공매도를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것도 반대론의 근거다.
일리 있는 지적들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는 것과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건 다른 얘기다. 잘못된 것은 고치면 된다. 공매도 활용 기회에서 개인이 외국인과 기관에 비해 절대적으로 불리하며, 정보비대칭성을 대형 투자가들이 공매도에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점은 개선이 필요하다. 대주(貸株)시장을 확대해 개인들의 공매도 접근 기회를 넓혀주고, 불법 공매도 처벌을 강화하며, 대형주로 공매도 대상을 제한해 부작용을 최소화하자는 등의 개선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제도 개선 없이 ‘공매도 중단조치 3~6개월 연장’을 밀어붙일 기세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제도 개선 등의 선행조치를 하지 않으면 공매도 재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로 그런 속내를 털어놨다. 황당한 얘기다. 10개월 넘는 중단기간 동안 뭘 하다 이런 얘기를 하는지, “그냥 손 놓고 있었다”는 자백을 이렇게 당당하게 해도 되는 건지 어리둥절해진다.
공매도 중단이 마냥 개인투자자들을 보호하는 조치일 수 없고, 되레 역효과가 클 것이라는 반론도 나오는 터다. 한국 증시가 1년 넘게 공매도를 금지하면 MSCI로부터 감점을 받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외국 기관투자가들이 한국 주식 보유 물량을 줄여야 해서다. 증시에 악재로 작용해 개인투자자들의 피해로 이어질 게 뻔하다. 이런 것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게 국정책임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런 것에 눈감은 채 당장의 정치 셈법만 따지는 각종 정책 드라이브가 나라를 깊은 골병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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