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포탄에 67년간 '휠체어 인생'…故목진홍 소령 "조국 위한 삶 후회는 없다"

입력 2021-01-26 17:33
수정 2021-01-27 00:16

“당신의 몸이 그리 됐는데도 국가에 감사하고 오히려 뿌듯하게 생각하셨습니다.”

6·25전쟁 참전용사 고(故) 목진홍 예비역 소령(사진)의 장남 목모씨(58)는 26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께서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돌아가실 때까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며 이같이 말했다. 목 소령은 6·25전쟁 중 부상으로 오른쪽 전신이 마비돼 67년간 병원과 휠체어에 의지하다 지난 17일 향년 90세로 별세했다.

부산 덕촌동에서 만난 목씨에 따르면 그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전장에 뛰어들었다. 부친은 유복한 가정에서 학업도 뛰어났던 아들의 참전을 한사코 만류했지만 그는 “학업도 좋지만 조국을 위해 작은 힘을 보태겠다”며 육군포병학교에 들어갔다. 소위로 임관해 2년간 서울탈환작전, 봉일천지구 전투, 두매리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지만 1952년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포탄을 맞아 쓰러졌다. 그가 눈을 뜬 곳은 육군수도병원 시신 안치실이었다. 시신을 확인하러 온 가족이 뜻밖에 그의 기침소리를 듣고 치료실로 옮겼다.

목 소령은 2010년 모교인 서울고 총동창회가 발간한 ‘경희궁의 영웅들’에 실린 수기에서 “깨어 보니 주위는 깜깜하고 목이 말랐고 기침도 났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오른쪽 전신이 마비된 그는 1958년 결국 병상에서 전역했다. 1급 상이용사가 된 아들의 모습을 본 부친은 충격에 세상을 떠났고 그는 휠체어를 타고 시장 좌판에서 화장지와 칫솔 장사에까지 나섰다.

유족들은 한평생 지병과 맞서 싸운 고인이 국가를 위해 싸웠다는 자긍심으로 삶을 버텨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평소 무뚝뚝하고 엄한 가장이었지만 자녀들에게 항상 강조한 것은 애국심이었다. 목씨는 “TV에 6·25전쟁 관련 영상이 나올 때면 휠체어에서도 갑자기 힘이 넘치셨다”며 “관련 영상이 나오거나 태극기를 볼 때면 불편한 몸으로도 거수경례를 하려고 하셨다”고 말했다.

남편을 헌신적으로 간호한 부인 강순이 씨(83)도 고인을 “몸이 불편해도 일평생 마음이 올곧았던 훌륭한 사람”이라고 회상한다. 강씨는 1953년 간호 봉사활동을 하러 간 육군병원에서 고인을 처음 만났다. 67년간 반신불수로 산 남편의 손발이 돼주며 악착같이 돈을 벌어 4남매를 키워야 했지만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고인은 생전에 “다시는 이 땅에 전쟁으로 인한 나와 같은 피해자가 없기를 바랄 뿐”이라 말하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족들은 그런 고인에 대한 국가의 처우는 아쉬웠다고 입을 모았다. 보훈처에서 6·25 참전용사들에게 매달 지급하는 참전수당은 30만원 남짓. 20년 가까이 집을 떠나 요양병원에서만 지낸 고인의 병원비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장남 목씨는 “아버지는 국가에서 보상금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하셨다”며 “돈보다 더 중요한 보상은 일평생 국가에 헌신적이었던 이런 분들이 우리 사회에서 잊혀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