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있을 정기 인사를 앞두고 법원장급이나 고등법원 부장판사 등 소위 '엘리트' 법관들이 법원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사표 러시'에 가깝습니다.
그런 와중에 1심 사건 처리율은 3년 연속 100%를 밑돌고 있습니다. 판사들 용어로 '미제를 못 털어내고 있는' 중 입니다.
종합해보면 안 풀리는 사건들은 계속해서 쌓여가는데 사법부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는 선배 법관들은 하나 둘 떠나가는 난감한 상황이 생기고 있는 겁니다. '엘리트' 법관들의 법원 러시법조계에 따르면 현재까지 사표를 낸 법관 수는 80여명에 달합니다. 그 중 법원장이나 고등법원 부장판사급이 20여명인 것으로 전해집니다.
참고로 2020년에는 법원장과 고법 부장을 합해서 6명, 2019년엔 8명이 사표를 냈습니다.
사법연수원 1등 출신의 19년차 법관은 최근 사법부를 떠나 국내 최대 로펌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헌법재판소 연구관 출신의 14년차 법관은 개인 사무실 개업을 준비 중입니다.
올해 사표를 낸 한 부장판사는 법원을 떠나는 이유를 묻자 "고법 부장제도가 폐지된 것도 있고, 앞으로 사건 수임이 제한되는 것도 있고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전에는 고법 부장을 달고 약 7~8년 정도 지나면 관행적으로 법원장 자리에 오르곤 했습니다. 지금은 고법 부장제 자체가 폐지되면서 법관들 사이에서 '승진' 개념이 사라졌습니다. 법원장도 일선 판사들의 추천을 받아 뽑는 '법원장 추천제'가 확대 도입됐습니다.
이 부장판사는 "그래도 예전에는 나간다고 하면 좀 잡는 분위기도 있었고 '조금만 더 버텨라'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요새는 10명 중 8명이 '잘 생각했다'는 식으로 말한다"며 "사법부가 이렇게까지 됐다는 게 마음이 좀 씁쓸하긴 하다"고 말했습니다.
법무부가 변호사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것도 한 몫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해당 개정안에 따르면 법원장이나 고법 부장, 검사장 출신 변호사들은 퇴직 전 3년 동안 근무한 기관의 사건을 퇴직 후 3년간 수임할 수 없습니다.
결론내지 못하고 쌓여가는 1심 사건들문제는 그 와중에 해결되지 못하고 법원에 쌓여가는 사건들이 늘고 있다는 겁니다. 1심 사건 처리율은 △2018년 98.1% △2019년 97.3% △2020년 97.4%로 연속해 100%를 밑돌고 있습니다.
사건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1심 법원에 접수된 사건 수 자체는 △2018년 126만 9122건 △2019년 126만 6391건 △2020년 125만 4298건으로 매년 줄고 있습니다.
즉 법원에 오는 절대적인 사건 수 자체는 줄고 있는데 사건이 처리되는 비율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는 "쟁점이 다소 복잡한 조세 사건이 있었는데 판사가 4번 바뀐 뒤에야 최근 1심 결론이 났다"며 "사건이 어렵고 복잡할수록, 그리고 지방일수록 사건을 다음 인사 때까지 미루고 해결하지 않은 채 (다음 발령지로) 가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심지어 법조계에서는 1심 판사들이 자꾸 쟁점이 복잡한 사건들을 뒤로 미루니까 2심에 올라오는 게 없어서 고법 판사들이 일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돈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미제'가 더 쌓이면 쌓였지 덜 쌓일 가능성은 낮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의 20년차 판사는 "내년부터는 7년 이상 법조경력을 가진 사람은 법관이 될 수 있지 않느냐"며 "아무리 변호사, 검사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도제식으로 길러낸 법관들에 비하면 일 처리 속도나 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건들이 점차 다양화·전문화되는 가운데 법리에 완숙한 고위 법관들이 사법부를 대거 빠져나가는 것은 결국 국민들에게 피해로 돌아온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지금 사의를 표한 법관들 대부분은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 연구관을 거친 사람들"이라며 "연구관들은 판례 하나를 가지고도 하루 종일 토론하고 연구하며 사건을 다각도로 보는 시각을 키운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런데 지금 지방법원 판사들 중 상당수가 연구관 경험이 없다"며 "복잡한 사건을 놓고 일주일에 4~5번씩도 재판해본 경험 등을 전수해 줄 고위 법관들이 사라진다는 건 결코 만만한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