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디플레이어원'으로 본 미래 산업 지형도…VR 헤드셋만 쓰면 나도 세상도 원하는 대로

입력 2021-01-23 11:01

2045년. 지구는 식량 파동으로 황폐하게 변했고 경제 기반은 무너진 지 오래다. 영화 레디플레이어원의 주인공 웨이드는 2025년에 태어난 자기 또래를 ‘사라진 세대’라고 부른다.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가상현실(VR) 게임인 ‘오아시스’에 접속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VR 헤드셋을 쓴 채 오아시스에 접속하는 순간 누구든 원하는 모습으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웨이드는 오아시스를 이렇게 표현한다. “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자 상상하는 모든 것이 이뤄지는 곳.” 현실과 상호작용하는 메타버스사건은 오아시스 개발자인 할리데이가 남긴 유언에서 시작된다. 유언 내용은 오아시스 안에 숨겨진 임무 세 가지를 마치는 사람에게 오아시스 운영권과 5000억달러가 넘는 회사 지분을 주겠다는 것. 경제 기반이 무너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오아시스 속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한 레디플레이어원은 증강현실(AR)과 VR이 일상이 된 미래를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해 주목받았다.

영화 속 오아시스는 코로나19 확산 이후 산업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개념인 ‘메타버스’의 일종이다. 메타버스(meta+verse)는 가상, 초월을 뜻하는 메타(meta)와 세계,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를 합쳐 만든 단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터넷 커뮤니티나 컴퓨터 게임 역시 가상세계다. 가상세계는 현실세계와 단절된 공간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컴퓨터 게임 속의 인간관계나 경제적 이득은 현실세계와 무관하다. 하지만 메타버스는 기존의 가상세계와는 다르다. 메타버스인 오아시스는 현실을 반영하고 오아시스 안의 행동은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웨이드는 오아시스 첫 번째 임무인 레이싱에서 승리한 상금으로 오아시스 속 시간을 1분 전으로 돌릴 수 있는 타임머신 아이템과 전신에 촉각을 느낄 수 있는 장치인 VR 슈트를 산다. 타임머신은 오아시스 내에서 사용하는 가상의 아이템이지만 VR 슈트는 오아시스에 접속하기 전 착용하는 실제 상품이다. 다음날 집으로 배달받은 VR 슈트를 입고 웨이드는 다시 오아시스의 세계로 접속한다. 메타버스인 오아시스는 이렇듯 매 순간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서로의 경계를 흐린다. 현실을 빼닮은 경제 시스템 수년째 아무도 통과하지 못한 첫 번째 임무를 마친 웨이드는 단숨에 오아시스 내 스타로 떠오른다. 오아시스 운영자에 한 발자국 다가선 웨이드에게 위험이 닥치는 것도 이때부터다. 영화 속 글로벌 2위 게임기업인 ‘IOI’는 오아시스 운영권을 가지기 위해 수만 명을 고용한 상태다. IOI는 웨이드를 경쟁에서 밀어내기 위해 웨이드의 집을 폭파하고 웨이드를 찾아내기 위해 추격전을 벌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IOI가 오아시스 운영권에 집착하는 이유는 오아시스 내에서 이뤄지는 경제활동의 규모가 현실 이상으로 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아시스 내 화폐인 코인을 벌기 위해 일하거나 게임 내 임무를 수행한다. 기업은 현실에서 광고하기보다는 메타버스인 오아시스 안에서 광고를 집행하려고 한다. 사람들이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공간이 오아시스이기 때문이다. IOI의 사장인 소렌토는 “오아시스는 세계에서 제일 중요한 경제 체제”라며 “오아시스를 장악해 게임 내 광고를 늘리고, 고가 아이템을 판매하겠다”고 선언한다. 메타버스의 두 번째 특징인 ‘완벽한 자체 경제 시스템 구축’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보기술(IT)로 구현하는 메타버스메타버스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 건 1992년 출간된 공상과학 소설 《스노 크래시》에서다. 30여 년 전 등장했던 메타버스라는 개념이 최근 들어서야 주목받는 건 메타버스를 실현할 수 있을 만큼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메타버스의 또 다른 특징은 가상과 현실의 물리적 이질감이 적다는 점이다. 오아시스에 입장하려면 먼저 VR 헤드셋을 착용해야 한다. 현실과 똑같은 시야각을 제공하는 헤드셋이다. 발아래에는 러닝머신처럼 생긴 발판이 있다.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전환도 가능하다. 게임 속에서 걷고 뛰려면 현실에서도 똑같이 해야 한다. 웨이드가 구입한 VR 슈트는 전신을 감싸는 타이츠처럼 생겼다. 이걸 입으면 게임 속의 촉각을 전신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맞으면 아프고 게임 속 의상의 부드러움까지도 전해진다. 사람들이 메타버스를 또 다른 현실로 여기는 이유다.

VR 기술 발전은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영국의 VR기기 전문 기업인 테슬라슈트는 지난해 열린 IT·가전 전시회(CES)에서 테슬라슈트 글러브를 선보였다. 장갑을 끼면 가상세계에서 느껴지는 손의 촉각을 현실에서도 느낄 수 있는 제품이다. 테슬라슈트는 레디플레이어원에 등장하는 VR 슈트와 비슷한 상품을 개발했다고 발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시각 청각 촉각을 메타버스에서 구현하려면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처리하는 게 필수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려면 반도체의 처리 속도와 용량이 뒷받침돼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반도체 기업이 호황을 누리는 것도 게임, 원격회의 등 온라인상에서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주고받아야 하는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레디플레이어원 속 글로벌 1·2위 기업은 게임회사가 독차지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반도체 기업들도 못지않은 수혜를 누리며 빠르게 성장했을 것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 현실로 다가온 메타버스 경제영화 속 배경은 2045년이지만 메타버스 경제는 이미 현실에 와 있다. 미국 10대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플랫폼은 유튜브가 아니라 모바일 게임인 로블록스다. 미국 16세 미만 청소년의 55%가 로블록스에 가입했고, 유튜브보다 2.5배 긴 시간을 로블록스에서 보내는 것으로 조사됐다. 월 1억 명의 사용자가 아바타를 활용해 로블록스 안에서 생활하고 가상화폐로 필요한 것을 사고판다. 로블록스는 빠른 성장세를 타고 올해 미국 증시에 상장할 예정이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람과 만나기 어렵게 된 정치인들도 메타버스로 눈을 돌렸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미국 대선에서 ‘동물의 숲’이라는 게임 안에 자신의 섬을 만들고 여기에서 선거유세를 펼쳤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어린이날 마인크래프트라는 게임 속에서 가상의 청와대를 만들고 어린이들을 초대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VR과 AR 시장이 2019년 455억달러에서 2030년에는 1조5429억달러로 30배 이상 불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웨이드는 IOI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아시스에서 만난 동료들과 협력하며 세 가지 임무를 모두 끝마친다. 오아시스의 운영자가 된 웨이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오아시스를 1주일에 이틀은 폐쇄하는 것. 대면이 사라지고 비대면만 남은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현실의 소중함을 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아시스 창시자인 할리데이는 말한다. “(메타버스에 비해) 현실은 차갑고 무서운 곳이지만 동시에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란다.” 미래를 먼저 그린 스필버그 감독이 관객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나수지 기자 suji@hankyung.com